《미국의 스타 경제학자 제프리 삭스 컬럼비아대 교수는 경제학을 ‘빈곤을 치료하는 의학’이라고 말한다. 29세에 하버드대 최연소 정교수가 돼 많은 개도국과 국제기구 자문 역으로 활약했으며 코피 아난 전 유엔 사무총장의 특별보좌관이기도 했던 그는 ‘한국 예찬론자’이기도 하다. ‘선진국 중 가난했던 과거를 기억하는 얼마 안 되는 부자 나라 한국’이야말로 가난한 나라의 빈곤 탈출을 도울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갖췄다는 것이다.》
라오스에 한국의 교육열을… 라오스의 한 고등학교 학생들이 뒷면에 라오스 국기와 태극기가 나란히 인쇄된 교과서를 들어 보이고 있다. 교과서 인쇄공장을 세워주고 장비를 지원하는 이 사업은 동티모르와 세네갈 등에서도 실시할 예정이다.1950년대 국제원조로 지원된 교과서로 공부했던 한국인의 경험이 이 원조사업의 출발이 됐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 ○ ‘도와주는 상상력’이 다르다
세계 원조 전문가들은 한국이 원조 초년국이긴 하지만 ‘받았던 나라가 주는 나라가 된 최초의 사례’라는 점에서 어느 선진국보다 비교우위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 ‘한국형 원조모델’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한국 국제협력단(KOICA) 캄보디아 사무소의 신의철 소장은 “한국의 중장년 세대라면 가난한 나라들을 둘러볼 때 바로 1950, 60년대 우리 모습을 떠올리며 동정심과 연민을 갖는다”며 “우리는 돈과 물건을 공짜로 나눠주는 것보다 ‘잘살려는 의지’를 북돋우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다른 나라들과 비교할 때 ‘도와주는 상상력’이 다르다”고 말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페루 도자기마을과 라오스 교과서 사업이다. 잉카문명의 대표 유적지 마추픽추에서 100km가량 떨어진 작은 산간마을 ‘코라요’ 주민들의 삶은 한국인 관광객들의 ‘측은지심’과 봉사단원들의 열정으로 삶이 180도 달라진 경우다. 옥수수와 감자 농사로 월 50달러 극빈생활을 하던 그들의 유일한 부업은 도자기를 구워 내다파는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곳을 지나던 한국인 관광객이 도자기의 질과 디자인이 우수한데 이것을 살려서 도울 방법이 없겠느냐는 제안을 KOICA에 했고 봉사단원까지 파견하기에 이른 것. 마침내 2004년 10월 단원 6명이 파견됐고 이들은 헌신적인 활동으로 코라요를 ‘자기(瓷器)마을’로 거듭나게 했다. 현재 이곳의 평균 소득은 월 300달러에 달한다.
라오스 교과서 사업도 한국의 가난 경험이 발판이 된 경우. 현재 라오스 중고교생들은 교과서 뒷면에 라오스국기와 태극기가 나란히 인쇄돼 있는 교과서로 공부하고 있다. 한국 정부가 교과서 인쇄기는 물론 인쇄출판 전문가까지 파견해 도와준 결과다. 1950년대 학교를 다녔던 한국의 장년층은 유엔한국재건위원단(UNKRA) 교과서에 대한 기억이 또렷하다. 라오스 교과서 지원 아이디어도 교과서가 없어 제대로 공부를 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보고 현지 봉사단원이 낸 것이었다. KOICA와 연세대가 에티오피아에서 펴고 있는 가족계획 사업도 마찬가지. 봉사단원들은 아프리카 최빈국이면서 다산(多産)국인 이곳에서 30년 전 우리가 했던 것처럼 오지마을 주민들을 찾아다니며 가족계획의 중요성을 알리고 피임시술을 하고 있다.
에티오피아에 가족계획운동을… 에티오피아 곤다르 지역의 보건소에서 한 여성이 피임주사를 맞고 있다. 한국인들은 아프리카 최빈국이자 다산국인 이곳에서 30년 전 우리가 했던 것처럼 오지마을 주민들을 찾아다니면서 가족계획운동을 벌이고 있다. 한국의 경험을 살린 전형적 한국형 원조 모델의 하나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 캄보디아로 들어오는 모든 원조를 총괄하는 캄보디아 개발위원회(CDC·Council of Development for Cambodia) 판야 웬니다 국장은 “한국을 보면 우리가 지금은 비록 가난해서 남의 나라 도움을 받지만 언젠가 한국처럼 될 수 있다는 희망이 보인다. 선진국들도 ‘한국을 봐라’ ‘한국은 저렇게 일어서지 않았느냐’를 강조한다. 한국이라는 나라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국제 원조에 기여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한강의 기적’을 이룬 경험과 노하우는 개도국들이 가장 전수받고 싶어 하는 소프트웨어다. 대표적인 나라가 알제리. 프랑스 식민지였던 이 나라는 한반도 10배 크기 면적에 세계 14위 원유 매장량과 세계 9위 천연가스 매장량을 가진 자원부국이지만 개발 노하우가 없어 전전긍긍하던 끝에 ‘한국’을 알게 되어 본격적으로 문을 두드렸다. 알제리 대통령은 2006년 3월 노무현 대통령이 방문했을 때 최고 국빈 대접을 하면서 “개발 경험을 가르쳐달라”고 했고 이후 고급공무원 특별연수를 시작으로 산업개발정책, 신도시 건설사업까지 모두 한국의 도움을 받고 있다. 세네갈도 마찬가지. 주일 대사가 주한 대사를 겸임할 정도로 한국에 대해 소홀했던 나라였지만 2007년 압둘라예 와데 대통령이 “한국을 배우라”고 지시하면서 주한 세네갈대사관이 만들어졌다.
KOICA 박대원 이사장은 “개도국들은 대부분 과거 식민지여서 선진국 원조를 당연하게 여기거나 내정간섭으로까지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는데 한국과는 식민에 대한 부채가 없는 데다 오히려 똑같은 식민지 경험을 가졌던 나라가 도와준다는 점에서 더 진정성을 느낀다”고 했다. 권율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ODA 팀장도 “잘살 수 있다는 희망과 의지를 보여주는 인적활동 중심인 ‘한국형 원조모델’이야말로 빈곤 탈출이 목적인 해외 원조의 최적 모델”이라고 말했다.
○ ‘품앗이 원조’의 시작 보은(報恩) 원조
우리가 받았던 도움을 국제사회에 되돌려주자는 ‘품앗이 정신’의 대표 격이 보은 원조다. 다름 아닌 6·25전쟁에 참전해 목숨을 바친 인연이 있는 나라를 돕는 것이다. 대표적인 나라가 1인당 국민총소득(GNI) 220달러로 참전국 중 최빈국으로 전락한 에티오피아. 한국 정부는 보은의 마음과 우리의 교육열을 살려 2006년 코리아 사파르(한국촌)에 히브레피레 초등학교를 지어주고 봉사단원을 통해 지속적인 교육사업을 했다. 그 결과 이 학교는 지역학력평가에서 1위를 하는 등 현지 학부모들이 가장 선호하는 최우수 학교가 됐다.
한때 아시아 선진국으로 불렸지만 후진국으로 전락한 필리핀도 마찬가지. 3모작이 가능하지만 원시적인 정미 방식으로 식량을 자급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에 착안해 지난해부터 4개년 계획으로 5개 주에 미곡종합처리장(RPC)을 지어주고 있다. 이미 시설이 완공된 오로라 주에서 도정되는 ‘KOICA 쌀’은 수도 마닐라 대형마트에서도 최고 품질로 인기가 높다. 2009년에는 중남미 유일의 참전국 콜롬비아에도 KOICA 사무소가 개설됐다. 참전 상이용사와 내전으로 다친 이들을 위해 한-콜롬비아 우호재활센터도 짓고 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원조는 주는 쪽이 아니라 받는 쪽 입장을 고려하는 게 목표이므로 너무 ‘한국형’에 강박을 가질 필요는 없다”(김은미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 최원기 외교안보연구원 경제통상연구부 교수)고 조언했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김윤종 기자 zozo@donga.com ▼원조후진국 한국, 민간인 기부는 뜨겁다▼
유니세프 모금액 10위, 월드비전 4위, 컴패션 3위
| 서울 관악구에서 행정차량 업무를 담당하는 공무원 안상기 씨(42)는 2년 전부터 국제어린이양육단체 ‘컴패션’을 통해 필리핀의 한 아이와 결연을 맺고 매달 4만5000원을 기부한다. 그는 “어렸을 때 학교에서 해외 원조로 온 빵을 먹어 본 경험도 있고, 이제는 우리가 갚아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직장인 김혜진 씨(29·여)는 국제원조단체 ‘월드비전’을 통해 모잠비크의 한 초등학교 4학년 어린이에게 매달 3만 원을 보내고 있다. 그는 “요즘엔 우리도 먹고살기 힘든데 왜 다른 사람을 돕느냐는 거부감이 많이 사라졌다. 어려운 나라 가난한 아이들의 부모 역할을 하는 샐러리맨들이 주변에도 많다”고 말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공적개발원조(ODA) 순위 최하위권 기부 후진국’이라는 오명과 달리 국내 ‘개미 기부자’들의 해외 기부 열기는 뜨겁다. ODA는 국가 원조 예산만 집계되어 민간단체 모금액은 잡히지 않는다. 월드비전 유니세프 굿네이버스 세이브더칠드런 지구촌나눔운동 한국해비타트 등 50개 국제구호단체가 모여 만든 한국해외원조단체협의회에 모인 지난해 모금액은 총 3292억 원(‘한국국제개발협력 NGO 편람’). 이는 KOICA의 올해 해외 무상원조 예산(총 3500억 원)에 육박한다. 여기에 컴패션 같은 여타 민간단체나 교회, 사찰 등 종교단체까지 합하면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구체적으로 국제구호단체들의 3년간 모금액 추이를 보면 열기가 얼마나 뜨거워지는지 알 수 있다. 유엔 산하 유니세프 한국위원회는 모금액이 2008년 272억6500만 원, 2009년 325억1700만 원에서 2010년 614억2100만 원으로 전년 대비 89%나 뛰었다. 이 중에는 100억 원의 개인 기부자까지 있다. 월드비전에도 지난해 10월까지 모금액(996억 원)이 이미 2009년 모금액(935억 원)을 훌쩍 뛰어넘었다. 세이브더칠드런 김노보 회장(66)은 “최근 4, 5년 사이에 개인 후원자가 급격히 늘었다”며 “기부자들의 절대 수치는 선진국에 비해 적은 편이지만 1인당 기부 규모는 소득 수준과 비교했을 때 선진국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고 본다”고 전했다.
유니세프 연차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36개 유니세프 위원회 중 한국은 2009년 모금액 규모 세계 10위다. 월드비전 관계자도 “모금액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해외아동 결연사업의 경우 소속 20개 회원국 중 한국이 미국, 캐나다, 호주에 이어 4위”라고 밝혔다. 한국 컴패션 역시 2010년 말 기준으로 11개 회원국 중 한국이 미국(1190만 달러), 호주(220만 달러)에 이어 3위(207만 달러)다. 김현순 홍보팀장은 “한국은 1993년 컴패션 수혜국을 졸업하고 2003년 후원국으로 돌아선 뒤 7년 만에 후원액수가 급증해 다른 회원국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고 전했다. 한편 이 같은 민간단체들은 회원국 형태로 독자적인 사업을 추진해 수원국들에 한국 브랜드를 널리 알린다. 이에 비해 유니세프 한국위원회의 경우 유엔 산하라는 특성상 모금액의 80%를 유엔으로 보낸다.
정정섭 해외원조단체협의회 회장은 “해외 원조의 경우 봉사 열정이나 의지 면에서 비정부기구(NGO)를 당해낼 수가 없다”며 “ODA 규모가 낮다고만 한탄할 게 아니라 민간의 열기를 살려 민관 합동으로 통합 효과를 낼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