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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강타하는 태풍의 위성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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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정벌을 주도했던 쿠빌라이 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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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몽 연합군의 1차 침공 때 태풍의 진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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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몽 연합군의 2차 정벌 때 태풍의 진로.
| “일본은 매년 태풍으로부터 엄청난 피해를 입으니 우리와 같이 태풍 세력을 약화시키는 실험을 해보지 않겠는가?” 인공강우 방법을 사용해 태풍의 위력을 약화시키는 실험을 함께 해보자고 미국 학자들이 제안하자, “태풍은 일본에 유익한 수자원을 가져다주는 고마운 기상현상이어서 그러한 조절실험에 참여하고 싶지 않다”고 정중하게 거절했다.
의외의 대답에 미국 학자들이 당황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태풍이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지켜준 신성한 자연현상이라는 인식이 일본인들에게 뿌리박혀 있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일본에는 몽골이 쳐들어 왔을 때 태풍이 불어와 그들을 지켜주었던 역사가 있다. 일본인들은 태풍을 하늘이 도운 바람이라 하여 가미카제(Kamikaze : 신의 바람)라고 부른다.
고려를 정복한 몽골은 일본에 사신을 보내 원나라에 복종하고 조공을 바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유목민인 몽골인들이 바다를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알아챈 일본은 몽골의 요구에 코웃음을 친다. 몽골인이 세운 원나라의 황제 쿠빌라이는 여섯 번에 걸쳐 일본에 사신을 파견했다. 그러나 일본이 계속해서 사신들을 모욕하고 박대해 돌려보내자 일본 정벌을 결행한다.
몽골은 고려에 대해 일본을 정벌하기 위한 준비를 독촉했고, 이에 고려에서는 장인 3만5000명을 동원해 900척의 배를 건조했다. 고려로서는 엄청난 재정부담이자 출혈이었다. 이 당시 일본을 공격하기 위한 병력은 몽골 및 북중국의 한족 혼성군이 2만5000명, 고려군 8000명, 키잡이 등 보조원 6700명으로 이뤄졌으며 1274년 5월 14일 마산에서 출정했다.
이때 원의 도원수는 홀돈이었고, 고려군은 김방경이 지휘했다. 여ㆍ몽 연합군은 월등한 전력과 함께 철포와 화전 등의 신무기를 보유했을 뿐만 아니라 활도 일본군의 활보다 작으면서도 사정거리는 길었다.
먼저 연합군은 대마도를 점령해 대마도주를 죽인 후 규슈로 향했다. 전투가 시작되자 상당한 준비를 갖췄다는 일본이었지만, 고려 장군 김방경의 분전으로 1000여 명의 사상자를 내며 패주한다. 김방경은 승세를 몰아 계속 공격할 것을 주장하나, 원의 대원수 홀돈은 머뭇거린다. 이때 일본의 대대적인 반격이 시작됐고 원나라의 좌부원수 유복형이 화살을 맞자 연합군은 함대로 철수한다. 그러나 바로 그날 밤 태풍을 만난 정벌군의 함대는 큰 타격을 받는다. 이때 정벌군 총 2만5000명 중 1만3500명이 익사했고 고려군 5300명 중 2700명만이 겨우 살아 돌아왔으며 200여 척의 전함이 바위와 언덕에 부딪쳐 부서지고 침몰됐다.
1차 일본 정벌에 실패한 몽골의 쿠빌라이 황제는 정동행성을 설치하고 일본을 재정벌하기 위한 준비를 서둘렀다. 고려의 충렬왕은 어려운 국가사정을 설명하고 선처해 줄 것을 간곡히 청했으나 일언지하에 거절당하고 만다. 결국 2차 정벌에서도 고려는 엄청난 부담을 안게 됐는데 병선 900척, 식량 11만 석, 노 젓는 사람 1만5000명, 군인 1만 명 등 고려의 입장에선 엄청난 출혈이었다. 1281년 남송을 멸망시킨 쿠빌라이는 결국 일본 2차 정벌을 결행한다.
그는 병력을 동로군과 강남군, 크게 두 개로 나눠 일본을 침공한다. 먼저 동로군을 몽골과 고려의 연합군 4만 명에 병선 900척으로 전면에 배치시키고, 강남군은 10만 명과 병선 3500척으로 후위에서 돕게 한다. 그러나 일본도 무려 7년 동안 몽골의 재침략에 대비해 만반의 준비를 해 왔다. 그들은 해안에 견고한 돌성을 세웠고, 병사들의 훈련에 힘을 쏟았다. 5월 여·몽 연합군이 합포에서 출발해 규슈의 섬들을 공략하고 하카다(博多)에 도착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총력을 집결해 7주 동안 해안선을 단호히 지키는 데 성공한다. 또한 근해에서는 일본 해군이 연합군의 군함에 상당한 타격을 가한다. 일본군의 분전으로 동로군은 아예 상륙조차 못하고 강남군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리는 사이 전염병이 돌아 3000명이나 죽는다. 7월 말 드디어 강남군이 도착하지만 싸워보기도 전에 8월 15일 태풍이 북상하면서 강남군은 거의 다 익사하고 큰 타격을 입은 여·몽 연합군도 결국은 퇴각한다.
몽골의 2차 정벌도 태풍으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다. 고려사에서는 이때 약 10만 명이 돌아오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려 수군선장들은 태풍이 내습할 것을 미리 알았다고 한다. 그래서 배를 만(灣)에서 미리 밖으로 대피시켰으나 약 3분의 1정도의 병력이 익사했다고 하며, 강남군은 태풍이 닥치자 배들을 만의 출구 밖으로 앞다퉈 나가려고 하다가 높은 파도와 세찬 바람에 밀려 만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입구에서 부딪히고 부서져서 침몰했는데, 밀려든 시체더미가 쌓여 바다 위를 걸어서 다닐 수 있을 정도였으며 병력의 절반 정도가 손실됐다고 한다.
[TIP]자살특공대 가미카제의 어원은? `신이 보낸 바람'이라는 뜻에서 유래
기상학자들은 몽골의 1차 정벌 때 영향을 줬던 태풍이 대마도 해협 쪽으로 통과한 것으로 추정한다. 연합군 함대는 태풍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보통 태풍에 동반된 강한 바람과 호우는 선박을 쉽게 파괴하며, 특히 밀물시간과 일치하면 심한 해일로 더 큰 피해를 입는다.
지금의 최신식 전함도 태풍 앞에서는 꼬리를 내리는데, 하물며 당시 함선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통계적으로 10월에 태풍이 대한해협 쪽으로 통과할 확률은 1.4%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2차 정벌 때 태풍은 규슈 앞바다 쪽으로 통과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정벌군은 태풍의 중심부에 놓여 있었을 것이다. 8월 초 규슈 앞바다로 태풍이 지나갈 확률은 4% 정도다.
1차 정벌 시 태풍을 만날 확률이 1.4% 였으니 두 번이나 태풍의 영향을 받은 것은 우연이라고 하기엔 확률이 너무 낮다. 그래서인가? 일본인들은 신이 자기들을 돕기 위해 태풍을 보냈다고 믿고 있다.
또한 몽골의 침략을 받은 나라 중 유일하게 정복당하지 않았다는 자부심은 역사에서 그들의 큰 자랑거리다.
태평양전쟁 때 일본군 자살특공대의 이름으로 사용된 가미카제는 신이 보낸 바람이라는 뜻의 가미카제(Kamikaze : 신의 바람, 神風 : The Divine Wind)에서 유래했다.
<반기성 연세대 지구환경연구소 전문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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