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겁게 살아가는 중년 삶의 이야기

여행사진이야기

"사람 얼굴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피사체입니다"-서성일

惟石정순삼 2009. 10. 5. 12:08

 

세계 최대 스튜디오 '채리스' 맡은 서성일
캔버스에 명화처럼 프린트… 사람이 주름잡히는 것처럼
오래된 사진은 앤티크로 변해… "사진은 사람과 똑같습니다"
평생 목표인 '채리스' 入城

"50년 넘게 대 이어 쌓아온 조명 기법이 매뉴얼화로… 사진 촬영의 신천지 보는 듯"

2007년 4월 30일 밤 12시 서성일(徐成一·52·미국명 제이콥 서)의 휴대전화에 메시지가 떴다. "제이콥, 새 오너가 된 걸 축하해!" 흥분해 밤잠을 설친 그는 다음날 새벽 LA 파사데나의 '스튜디오 채리스(Charis)'로 달려갔다.

건물 앞에는 직원들이 도열해 있었다. 그들은 서성일을 보자마자 환호하며 정문을 여는 키를 건넸다.
강원도 횡성 시골 소년이 유서 깊은 세계 최고 스튜디오의 3대(代) 헤드 포토그래퍼가 되는 순간이었다.

한국처럼
미국에서도 사진학도의 기피분야가 있다. 인물 사진이다. '인물=증명사진'이란 인식이 그곳에서도 강하다. 1950년 필립 채리스가 그런 인식을 깼다. 사진을 명화(名畵)처럼 만드는 기법을 개발해낸 것이다.

채리스에서는 필름을 인화지가 아닌 캔버스에 고열(高熱)을 가해 프린트한다. 촬영에서 사진이 완성될 때까지 한달 반이나 걸린다. 유화(油畵)를 만드는 예술 작업과 다름없다. 미국은 물론 세계 유명인들이 열광했다.

스튜디오 채리스는 미국의 명문대 브룩스 사진학교생들이 가장 인턴을 하고 싶어하는 곳이다. 사진도 사진일 뿐더러 촬영에서 가장 중요한 조명(照明)을 다루는 비법(秘法)이 대를 이어 전수되고 있기 때문이다.

채리스는 은퇴하면서 공모(公募)로 2대 헤드 포토그래퍼를 선발했다. 2대 브뇌아가 1992년부터 15년간 스튜디오를 이끌다 은퇴하면서 대(代)가 다시 바뀐 것이다. 그 여정(旅程)을 쫓아가본다.

카메라와 태권도

서성일은 강원도 횡성 둔내면에서 농부 아버지의 2남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둔내 중·고를 나온 그는 공부를 무척 못했다. 대입시험에서 세차례 낙방해 지방 공업전문학교에 겨우 들어갔지만 몇달 뒤 그만두고 입대했다.

세계 최고의 인물사진가도 카메라 앞에서 얼어붙었다. 웃으라고 하자 굉장히 부끄러워하며 “허~참~”을 연발했다. 오른손에 끼고 있는 반지가 스승 앤더슨이 남긴 유품이다. 햇살 밝은 날 아침 압구정동의 한 교회에서. ☞ 동영상 chosun.com / 오종찬 기자 ojc1979@chosun.com
육군 원주제1통신단에서 제대한 그는 다시 입시에 도전했다. 예비고사 190점을 겨우 넘긴 학생이 서울법대에 합격했던 그해 그는 170점을 맞았다. 강원도의 한 대학 생물학과에 합격했지만 등록만 하고 그만뒀다.

그때 미국 켄터키에 있는 삼촌에게서 연락이 왔다. "미국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삼촌은 우석대 교수였다.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 시절 반(反)정부 활동을 하다 밉보여 미국으로 건너간 것이다.

서성일이 잘하는 건 딱 두 가지였다. 어렸을 적 아버지가 사준 캐논QL로 익힌 사진과 태권도였다. 창무관 출신으로 4단증을 가지고 있던 그는 1983년 8월 수중에 100달러도 안 되는 돈을 들고 삼촌이 있는 켄터키로 갔다.

아버지는 그의 미국행을 끝까지 반대했다. 마지막에 뜻을 접으며 아버지는 울면서 아들에게 말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다시 올 생각하지 마라. 거기서 서씨의 뿌리를 내려라." 아버지는 88년 사망했다.

미국에서 서성일은 태권도 사범으로 일하면서 켄터키주립대에 입학했다. 거기서 삶의 은인 2명을 만났다. 사진학과 교수 리 앤더슨은 서성일을 끔찍이 아꼈다. 피부암으로 사망할 때 유품을 모두 서성일에게 넘길 정도였다.

백인 학생 가운데 유일한 유색(有色)인종인 그가 앤더슨의 눈에 띈 것은 못하는 영어가 계기가 됐다. 서성일은 숙제(宿題)를 뜻하는 '어사인먼트(assignment)'라는 단어를 알아듣지 못했다.

그가 보기 딱했는지 한 여학생이 앤더슨에게 데려가 어사인먼트가 무슨 뜻이고 무엇을 언제까지 제출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줬다. 숙제는 포토그램이었다. 인화지에 풀이나 꽃을 올려놓고 햇빛으로 인화하는 것이다.

다른 학생들은 포토그램을 해본 적이 없어 진땀을 흘렸지만 서성일에겐 식은 죽 먹기였다. 그는 마치 화병에 꽃이 꽂혀 있는 것 같은 작품을 30분 만에 완성했다. 앤더슨이 동양청년에게 반하는 순간이었다.

수업이 없는 날이면 서성일은 교회로 갔다. 거기서 지금의 아내 서규희(50)를 만나게 된다. 아내는 처음에는 서성일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이 집념의 사나이는 사진기로 여자의 마음을 녹여내기 시작했다.

바이올린을 전공했던 아내가 공부를 더 하기 위해 하와이로 갔을 때는 매일 편지를 썼고 전화를 걸었다. 사랑을 고백하는 테이프를 보내기도 했다. 몇 개월이 지나자 '하와이로 와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라'는 연락이 왔다.

1986년 10월 11일 둘은 부부가 됐다. 그 후 아내는 서성일의 멘토가 됐다. 수업내용을 녹음해오면 일일이 번역해줬고 시험 때면 족집게 예상문제를 뽑아 모조리 암기하도록 했다. 서성일은 내용도 모르고 모조리 베껴 썼다.

브룩스사진학교를 졸업할 때 그의 성적은 4.0만점에 3.78로 수석(首席)이었다. 서성일은 나중에 LA 한인타운에 만든 첫 스튜디오의 이름을 아내에게 바쳤다. 스튜디오 Q가 규희에서 왔다는 것이다.

사람이 가장 아름답다

서성일도 처음에는 커머셜 포토(상업사진)를 전공했다. 그러나 조명의 매력에 빠졌고 조명이 빚어내는 가장 아름다운 피사체(被寫體)가 인물사진임을 알게 됐다. 브룩스사진학교에서 그는 거의 유일하게 인물사진을 전공했다.

지금도 그는 사람들의 반응에 놀란다고 한다. 브룩스 출신임을 알면 존경하던 눈빛이 '인물사진'이라는 말에 '경멸'로 바뀐다는 것이다. 심지어 "사진관 하세요?"라는 비아냥도 자주 듣는다.

―그런데 듣고 보니 스튜디오 채리스도 사진관이잖아요. 사진관이란 말이 듣기 싫나요?

"사진관 맞아요. 다만 이곳의 사진은 우리가 흔히 아는 증명사진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술작품이라고 불러요."

―그런 예술작품은 가격이 얼마나 됩니까.

"크기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500만원쯤 합니다. 가로 세로가 20×24인치 규격일 경우가 그렇습니다. 40×50인치는 1만달러(약 1200만원)쯤 합니다. 최고가는 1만7000달러(약 2000만원)였습니다."

―무척 비싼데 할인도 해줍니까.

"저희 스튜디오는 메이시스 백화점에도 지점이 있어요. 고객과 거래하는 전 과정을 누구든 컴퓨터로 체크할 수 있습니다. 누군 할인해주고 누군 안해준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만일 사진이 마음에 안들면요.

"안 들 수가 없지요. 저희는 처음에 사진을 촬영하면 아무런 수정(修正)도 가하지 않은 걸 고객과 보고 상의를 합니다. 이런 절차를 여러 번 합니다. 전신을 찍을지, 상반신만 할지, 4분의 3만 할지도 정합니다. 사진을 걸 장소도 미리 컨설팅을 합니다. 가로로 걸지, 세로로 걸지까지. 맞춤양복을 제작하는 과정과 비슷하지요."

―그런 사진은 내구성이 얼마나 되나요.

"보통 70년은 갑니다. 그 이상이 되면 앤티크처럼 변해요. 사람이 주름잡히는 것처럼요. 사진은 사람과 똑같습니다."

―사진기는 어떤 걸 사용합니까.

"대형카메라를 씁니다. 시나(Sinar)라고 필름 규격이 4×5인치입니다. 디지털카메라로는 캐논 5D를 쓰고요."

―필름카메라를 고집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선명한 사진은 디지털이 낫지만 어느 색이 다른 색으로 부드럽게 넘어가는 부분에서 필름카메라를 아직 당할 수 없지요."

―LA 한인타운에 첫 스튜디오를 냈을 때 고생을 많이 했다면서요.

"교민의 90%는 저를 아주 좋아하고 10%는 저를 아주 싫어합니다."

―왜요?

"한국인들은 가족사진을 찍을 때 자기만 튀려고 하는 경향이 있어요. 특히 주부들이 제일 입김이 세요. 무턱대고 빨간 옷을 입고 나옵니다. 배경은 무조건 밝게 하려하지요. 가족사진은 전체의 조화가 제일 중요한데도요. 그러면 가족사진이 아니라 주부만 툭 튀어나와 보이지요."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았겠군요.

"한 3년쯤 하다 이 일을 때려칠 생각까지 했어요. 나중에는 아이디어를 냈지요. 한번은 고객이 원하는 대로, 또 한번은 제가 원하는 대로 촬영을 한 뒤 보여주는 겁니다. 처음에는 본인들 뜻을 고집하다 나중에는 제 말에 수긍하게 되지요."

그의 피사체들

대화를 하는데 서성일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입은 계속 움직이는데 눈은 기자의 얼굴을 뜯어보는 중이었다. 인물 사진의 대가(大家)다운 본능을 피사체 앞에서 숨기기 힘들었던 것이다. 기자가 물었다. "제 얼짱각도는 뭡니까."

"사람 얼굴은 좌우로 나눠보면 거의 비(非)대칭입니다. 문 부장은 머리숱이 없으니 조명을 낮게 치고 카메라는 로앵글로 가야 해요. 오른쪽 눈이 작으니, 얼굴을 왼쪽으로 돌려보세요. 조금 더, 그만! 지금이 얼짱각도예요."

―그럼 포토제닉하다는 건 뭡니까.

"얼굴이 정확하게 대칭이 되는 사람을 말하지요."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 부부를 촬영한 적이 있지요.

"야당 총재 시절 미국에 왔을 때 의뢰를 받았어요. 저는 그분을 싫어했지만요. 주위에서 자꾸 웃는 얼굴을 찍어달라고 했는데 저는 생각이 달랐어요. 그의 인생 역정(歷程)이 웃는 것과는 거리가 멀잖아요. 지금 앞에 있는 이 사진은 그분도 촬영한 사실을 모를 겁니다. 내셔널프레스센터에서 사인할 때 포착한 것인데 그의 카리스마가 잘 나타나 있지요. 그런데 이번 영결식 때 걸린 사진은 정말 마음에 안들었어요."

김동길(金東吉) 교수는 왜?

"제가 어렸을 적부터 그분을 좋아했어요. 김 교수는 항상 나비넥타이가 트레이드마크처럼 여겨졌는데 저는 아예 잠옷 차림의 노인(老人)을 찍고 싶었습니다. 그분을 10년 넘게 촬영하고 있습니다."

―이 이해인(李海仁) 수녀 사진을 찍을 때는요.

"그분은 눈빛만 봐도 뭔가 말하고 싶어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어요. 그래서 45도 각도를 택한 겁니다."

―영화배우
최은희씨도 있군요.

"최은희씨는 고집이 셌어요. 북한에 납치당했던 경험 때문인지 주변에 누가 있는 걸 싫어하고 꼭 모자를 쓰려고 했어요. 일단 그의 주문에 응하고 '한번만 제가 원하는 포즈로 해보자'고 해 응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커피잔을 들게 한 겁니다. 서민적이고 뭔가 퍼져 있는 느낌을 살리기 위해서요."

―돈을 준다고 해도 촬영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까.

"호남의 유명한 정치인 A씨는 거절한 적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모르고 찍고 싶다는 의욕도 생기지 않더군요."

―꼭 찍어보고 싶은 사람도 있나요.

"
노무현(盧武鉉) 전 대통령이요. 재임시절 TV로 봤을 때는 머리 모양이 꼭 조폭(組暴) 같았는데 퇴임 후 고향에서 밀짚모자 벗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어요. 굉장히 서민적인 느낌을 줬고요. 만일 살아계셨다면 제가 촬영했을 겁니다."

―대통령들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명박(李明博) 대통령은 어떤가요.

"이 대통령은 얼굴이 조금 각이 져 있죠. 눈도 작고요. 제가 찍는다면 앵글을 높이겠습니다. 그럼 눈을 크게 뜨겠죠. 정면보다는 측면 사진이 더 나을 것 같아요. 예의 없는 젊은이들은 대통령을 어떤 동물에 비유하던데 사진가의 눈으로 보면 그는 얼굴이 예쁜 편입니다."

―말이 나온 김에
김영삼(金泳三), 전두환(全斗煥) 전 대통령도 평해보시죠.

"김영삼 전 대통령은 고집이 세보이죠. 눈도 약간 처졌고요. 이마가 넓으니 로앵글로 가야 합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머리쪽에 조명을 치면 안됩니다. 당연히 주광(主光)이 낮아져야겠죠."

―그럼 가장 포토제닉한 대통령은 누굽니까.

"박정희 전 대통령입니다. 얼굴이 작고 정확히 좌우 대칭입니다."

―그럼 그 딸인
박근혜(朴槿惠) 한나라당 전 대표도?

"박 전 대표는 눈매가 무서운 분이에요. 턱선도 가파르게 빠져 있고요. 앵글과 조명을 모두 낮추고 머리 가르마 있는 곳에서 촬영하는 게 가장 나을 것 같습니다."

또 다른 꿈을 향해

서성일은 브룩스사진학교 시절 스튜디오 채리스 인턴에 응모했다 고배를 마셨다. 그에게 채리스 입성(入城)은 평생의 목표였다. 그런데 평소 쌓아놓은 신뢰가 그 길을 우연히 터줬다.

사진에서 프레임(frame)은 사람으로 치면 옷과 같다. 가격도 매우 비싸다. 그는 레빈 프레임 컴퍼니와 오랫동안 거래해왔다. 그런데 우연히 레빈 컴퍼니 출신이 독립해 똑같은 품질의 프레임을 반값에 파는 걸 목격했다.

그는 레빈에게 그 사실을 알려 레빈의 신뢰를 얻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제이콥, 네 꿈이 채리스 인수라고 하지 않았어? 3대 헤드 포토그래퍼를 공모한다던데?"

2대 헤드 포토그래퍼 브뇌아는 프랑스인이었다. 급히 응모를 하니 경쟁률이 5대1이었다. 1주일 후 브뇌아로부터 연락이 왔다. 포트폴리오를 보내보라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1주일 뒤 이번엔 스튜디오 실사(實査)가 있었다.

―돈만 내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렇게 복잡하게 후계자를 결정하는군요.

"브뇌아는 아내와 함께 제가 베벌리힐스에서 경영하는 스튜디오 '라이트 오브 아트(Light of Art)'로 왔어요. 제가 그때 그를 한식당으로 데려가 제의한 게 있습니다. '은퇴하더라도 한국에서 사진교육을 맡아달라'는 것이었어요."

―그 말에 넘어가던가요.

"아내도 그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런 정성이 통했는지 텍사스 출신의 사진가에게 거의 넘어갈 뻔했던 스튜디오 채리스의 헤드 포토그래퍼 자리가 제게 온 거죠."

―인수금이 얼맙니까.

"한화로 6억원쯤 됩니다."

―그런데 건물 소유권은 없다면서요.

"스튜디오 경영만 할 수 있는 거지요. 비싸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아요. 50년 넘게 대를 이어 쌓아온 조명 기법이 매뉴얼화돼 있거든요. 그걸 보면 사진 촬영의 신천지를 보는 느낌이 듭니다. 예를 들면 어떤 거리에서는 노출을 어떻게 주고 하는 게 다 나와 있어요."

―언제까지 스튜디오 채리스를 할 생각입니까.

"세상에서는 제가 인물사진가로만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다큐멘터리 촬영도 해요. 이번에 10월 23일부터 갤러리 인데코에서 인물사진 전시회를 합니다. 작년에는
캘리포니아에서 '아프리카의 희망'이란 주제로 다큐멘터리 전시회도 했지요. 제가 1년에 적어도 4번은 해외선교를 하거든요. 제 꿈은 선교하는 겁니다. 서울에 지사를 낼 계획인데 한 4~5년쯤 후에는 선교를 향한 꿈을 이룰 겁니다."

―그렇게 애써 인수한 걸 그리 쉽게 내놓습니까.

"자리가 중요한 게 아니라 테크닉이 중요하니까요. 제 아내는 내년 1월
인도로 선교를 갑니다. 한 대학에 자리도 마련했어요. 저는 시베리아로 갈 겁니다."

지난 16일 서울 신사동 한 카페에서 미국 스투디오 채리스(Studio Charis)의 헤드 포토그래퍼 서성일씨를 만났다. 인물 사진 전문가 서성일씨가 말하는 전.현직 대통령의 인상을 들어봤다 / 오종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