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은 멀리 진안의 소백산에서 발원하여 임실, 남원, 구례 등 전남북의 동부 산간지를 돌아 경남 하동으로 해서 남해로 스며든다. 전북 장수의 수분재에 떨어지는 빗물이 북으로 흐르면 금강이요 남으로 흐르면 섬진강이라는 옛말은 수분재를 위한 덕담에 지나지 않는다.
섬진강은 곡성에서 보성강과 만나 세를 더하여 구례, 화개를 스치며 하동으로 흘러나온다. 남해고속도로 하동인터체인지에서 19번 국도를 타고 올라가면 만나는 하동은 행정구역 상으로는 경남에 속해있지만 섬진강 문화의 제일가는 곳으로 경남 - 전남의 경계를 허물어버린다. '하동포구 80리에 물새가 운다'는 대중가요 가사에서 보듯이 하동에서 섬진강 휴게소까지 80리 길은 한편으로는 강의 문화로 재첩국과 은어회와 줄나룻배로 유명하고 한편으로는 산의 문화로 산허리를 깍아 만든 계단식 논과 지리산 준령과 쌍계사, 화엄사, 천은사 등 사찰로 유명하다.
하동에서 10km 쯤 올라오면 평사리가 나온다. 평사리, 말만 들어도 박경리의 대하장편 <토지>가 떠오르는 곳이다. 평사리에서 지리산 자락으로 10분 남짓 들어가면 악양리가 나온다. 이 일대가 <토지>의 본격적인 무대다. <토지>는 구한말 4대에 걸친 세도가 최참판 댁의 몰락사를 통해 당시 사회상을 총체적으로 다룬 역작이다. 이 소설에는 양반, 상민, 농민, 노예가 섞여 있고 동학, 유학, 무속, 기독교가 혼재하고 평사리, 악양 들판은 물론 진주, 서울에서 멀리 북간도 만주까지 펼쳐지면서 구한말에서 일제말까지를 드넓게 장악하고 있다.
박경리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대하 장편 <토지>의 무대를 평사리로 잡은 까닭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경상도 안에서 작품의 무대를 찾으려 했던 이유는 언어 때문이다. 통영에서 태어나 진주에서 성장한 나는 <토지>의 주인공들이 쓰게 될 토속적인 언어로 경상도 이외의 다른 지방 말을 구사할 능력이 없었다. 그러나 <만석꾼>의 토지란 전라도 땅에나 있고 경상도 안에서 그만큼 광활한 토지를 발견하기는 어려웠다. 평사리는 경상도의 그 어느 곳보다 넓은 들을 가지고 있었으며 섬진강의 이미지와 지리산의 역사도 무게도 든든한 배경이 돼 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평사리를 <토지>의 무대로 정했다."
섬진강을 따라 평사리를 지나가면 화개가 나온다. 조영남의 노래로 유명한 화개장터다. 인근의 크고 작은 마을 사람들이 한자리에 만나는 화개 장터는 옛 명성은 많이 사라졌지만 '문화적인 교양'을 확인하러 찾아드는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특히 봄철에는 화개에서 지리산 쌍계사로 난 벚꽃 십리 길은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김동리는 단편 <역마>에서 화개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하동, 구례, 쌍계사의 세 갈래 길목이라, 오고가는 나그네로 하여, 화개장터엔 장날이 아니라도 언제나 흥청거리는 날이 많았다. 지리산 들어가는 길이 고래로 허다하지만 쌍계사 세이암의, 화개협 시오리를 끼고 앉은 화개장터의 이름이 높았고, 경상 전라 양도 접경이 한두 군데일 리 없지만, 또한 이 화개장터를 두고 일렀다. 장날이면 지리산 화전민들의 더덕, 도라지, 두릅, 고사리들이 화갯골에서 내려오고 전라도 황화물 장사들의 실 바늘, 면경, 가위, 허리끈, 주머니끈, 쪽집게, 골백분들이 또한 구례 길에서 넘어오고, 하동길에서는 섬진강 하류 해물 장사들의 김, 미역, 청각, 명태, 간조기, 간고등어들이 들어오곤 하여...... |
요즘 화개장터는 장터로서의 기능보다 경상, 전라 양도의 지역감정을 해소하는 상징적인 고장으로 더 유명해졌다. 화개, 하동에서는 경상과 전라의 차이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외지인들이 자꾸 지역감정의 상징적인 해결 장소로 부르다 보니 '아 지역감정이란 게 큰 문제긴 문제구나' 할 뿐 화개에서는 지역감정의 하찮은 기미도 찾기가 힘들다. 그 원인을 시인 김용택은 도도히 흐르는 섬진강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섬진강 마을 사람들 김병걸작사,김다양작곡,허풍수노래 바다와 강이 만나는 칠십리 하동포구에 누이의 귓볼처럼 연지빛 노을이 지면 은빛 백사장을 멀리 돌아가 얼룩소 고삐잡은 황톳길로 쟁기메고 돌아오는 섬진강 마을 사람들 사공의 노래 흘러온 칠십리 하동포구에 밥 짓는 저녁연기 정다운 강변을 돌아 하얀 조가비를 한아름 안고 싸립문 열고 오는 초가집에 인제오나 반겨주는 섬진강 마을 사람들
그의 연작 <섬진강> 중에서 제 1편을 읽으면서 이곳을 마감하고자 한다.
영산강으로 가는 물줄기를 불러
뼈 으스러지게 그리워 얼싸안고
지리산 뭉툭한 허리를 감고 돌아가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섬진강물이 어디 몇 놈이 달려들어
퍼낸다고 마를 강물이더냐고,
지리산이 저문 강물에 얼굴을 씻고
일어서서 껄껄 웃으며
무등산을 보며 그렇지 않느냐고 물어보면
노을 띤 무등산이 그렇다고 훤한 이마 끄덕이는
고갯짓을 바라보며
저무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어디 몇몇 애비 없는 후레자식들이
퍼간다고 마를 강물인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