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7.01.11 03:04 | 수정 : 2017.01.11 06:25
[65] 연오랑과 세오녀의 포항과 아흔아홉 살 사진가 서상호
해와 달의 땅 포항, 광명과 지혜의 상징… 해에 관한 신화 곳곳에
장기면 사무소에는 1871년 쇄국 선언 척화비… 나라는 39년 뒤 사라져
구룡포에는 일본인 어부들 살다 간 흔적이 그대로
백년 산 서상호는 그 역사를 기억과 사진으로 기록 중
사진가 서상호는 경상북도 포항시 구룡포에 산다. 3·1 만세운동이 벌어지기 석 주 전인 1919년 2월 6일 구룡포에서 태어나 100년째 구룡포에 산다. 한국 나이로 아흔아홉 살이다. 그동안 세상은 해방이 되었고, 분단이 되었고, 전쟁이 났고, 가난을 벗어났고, 민주화 몸살 끝에 조금은 살 만한 세상이 되었다.
老사진가와 구룡포
서상호가 말했다. "열다섯 살 때 골목에 사진관이 있었는데, 사진기사가 조선 사람이었다. 그 사람한테 졸라서 사진술을 배웠다. 필름 현상이랑 인화도 거기에서 다 하고. 아버지한테 졸라서 일제 카메라를 사서 열심히 찍어댔다."
그때 구룡포에는 일본인 어부들이 살았다. 식민지가 되기 전부터 일본 가가와현(香川縣) 어부들이 물고기 떼를 쫓아 구룡포까지 와서 살았다. 세토(瀨戶) 내해(內海) 가가와현에서 어업권 다툼에 패배한 힘없는 어부들이 와서 살았다. 1920년대 내해 건너 오카야마현(岡山縣) 어부들이 이주하면서 구룡포는 본격적으로 일본인 어항(漁港)으로 바뀌었다. 가가와현 중심 인물은 하시모토 젠기치(橋本善吉)였다. 오카야마현 출신 어부들은 도가와 야스부로(十河彌三郞)를 중심으로 뭉쳤다.
서상호가 말했다. "구룡포에서 4㎞ 정도 읍내로 가다 보면 굴이 하나 있었다. 사람들은 이 굴 너머 구룡포 사람들이랑은 사돈도 안 맺는다고 했다. 상놈들이니까." 백 년 전 '뱃놈'만 한 상놈이 또 있었을까. 그런데 일본인들이 구룡포를 차지하면서 구룡포 상것들은 인간 대접을 받게 되었다.
그 구룡포에서 서상호는 사진을 찍었고, 찍는다. 그가 말했다. "떠오르는 해가 너무나도 찬란한 것이다. 해 뜰 때만 되면 무조건 카메라 들고 바다로 갔다. 정신없이 황홀하게 사진을 찍었다." 기억이 쌓이면 역사가 된다. 희미해져 가는 기억을 서상호는 사진으로 각인해 놓았다. 매일처럼 포항 바다에는 해가 뜨는데, 이 사진가에게 똑같은 해는 단 한 번도 없다.
연오랑과 세오녀
포항 옛 이름은 영일이다. 해(日)를 맞는(迎) 영일이다. 서상호가 태어나기 1762년 전, 영일 땅에는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라는 부부가 살았다. 하루는 연오랑이 해초를 캐러 바다에 갔는데, 못 보던 바위에 물풀이 가득한 것이었다. 정신없이 따다 보니 바위가 동쪽으로 흘러가 버렸다. 일본에 바위가 닿자 없던 해가 솟고 연오랑은 그 고장 왕이 되었다. 며칠 뒤 세오녀가 바위를 타고 가 남편과 재회하니, 일본 땅에 없던 달도 솟았다. 신라에는 해와 달이 사라지고 말았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일이다. 저자 일연이 영일 땅에 머물며 사료(史料)를 수집해 연도(年度)까지 확정해 기록해 놓았다. 신라 8대 왕인 아달라 이사금 4년(서기 157년)에 벌어진 역사적 에피소드다. 기록은 이어진다.
신라 왕실이 부부를 찾아가자 이리 일렀다. "일본에 온 것은 하늘의 뜻이다. 세오녀가 짠 비단을 줄 터이니 우리가 살던 연못가에 가져가 제사를 올리라." 과연 그리 되었다. 신라는 해와 달을 되찾았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이후 부부가 살던 못은 일월지(日月池)라 불렀고, 그 주변 땅은 영일(迎日)이라 불렀다. 일연은 17년 뒤 일본에서 비미호(卑彌乎)라는 여왕이 사신을 보내 왕실을 찾았다고 기록했다.
신화를 역사로 보는 사람들은 태양과 불로 상징되는 철기 제조술과 비단으로 상징되는 직조술을 가진 소집단이 그 무렵 일본으로 이주했다고 주장한다. 부부 이름에 등장하는 까마귀[烏]는 보편적인 동아시아 설화인 태양 속 삼족오(三足烏)를 뜻하니, 이들은 태양 숭배 집단이었고.
일월지로 가본다. 일월지는 해병대 1사단 사령부 안에 있다. 주말에는 출입이 가능하다. 일월지임을 알리는 사적비가 서 있고, 둔덕 너머로 연못이 있다. 2000년 전 핵무기에 버금가는 철기 세력이 이곳에서 물을 공급해 무기와 농기구를 생산했다. 그 집단이 어느 날 일본으로 이주한 뒤 단기간에 대등한 세력으로 성장한 것이다. 드넓은 부대 경계 바깥에는 포항공항과 포스코가 있다.
해를 품고 낳은 아이, 정몽주
포은 정몽주는 영일 정씨다. 고향은 포항 오천(烏川)이다. 어머니가 몸을 푼 곳은 영천이라, 포항과 영천은 자기네가 고향이라고 주장한다(생전에 포은은 '영천 들판에는 벼가 그득하고/오천에는 물고기도 많구나/나는 둘 다 내 고향이라네('諸城驛夜雨' 中)'라고 써두었다).
정몽주의 아버지 정운관이 꿈을 꾸었다. 노인 하나가 얼른 아내와 합방을 하라고 다그치는데 해가 입속으로 들어왔다. 정운관이 서둘러 집에 가 길쌈 중인 아내 영천 이씨 손을 잡아끌었다. 마침 마당에서 말들이 교미 중이었다. "이 영감이 대낮부터!" 부아가 치민 정운관이 입을 열자 해가 말 배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에 놀란 이씨가 칼로 조랑말 배를 갈라 해를 마시고 합방해 태어난 아이가 정몽주다. 오천읍에는 정몽주를 기리는 오천서원이 서 있다. 해는 빛이며 지혜다. 신화를 읽을 때는 역사를 읽어야 한다. 연오랑이 되었든, 정몽주가 되었든, 일월지가 되었든, 오천이 되었든, 거기에는 역사가 있다.
장기읍성과 장기 척화비
장기면에 있는 장기읍성은 백성이 사는 성이면서 군사 요새다. 실학자 정약용은 천주교를 공부했다는 죄로 1801년 이 읍성에서 8개월 동안 유배 생활을 했다. 그리고 옮겨간 전남 강진에서 18년 동안 살았다. 성리학적 세계관은 '인간 운명을 하늘에 맡긴다'였다. 정약용을 위시한 실학자들은 '하늘(天理)은 하늘일 뿐, 세상(人倫)은 인간이 만든다'고 믿었다.
장기읍성에서 10분 거리 장기면사무소에 '장기척화비'가 있다. 때는 흥선대원군 시대, 병인·신미 두 양요에서 프랑스와 미국 해군에게 승리했다고 착각한 흥선대원군은 1871년 전국 곳곳에 "양놈과 손잡으면 매국노"라고 경고하는 비석을 세웠다. 조선은 나라 문을 완전히 닫아 버렸다. 11년 뒤인 1882년 임오군란이 터지고 흥선대원군은 청나라로 납치됐다. 1910년 나라 자체가 사라져 버렸다. 신화적 세계관 속에 허우적대다가 엄혹한 현실에 스스로 눈을 감은 탓이다.
용계정과 인륜, 그리고 실천
그 무렵 흥선대원군은 왕권에 시비 거는 서원들을 없애 버렸다. 1870년까지 팔도 서원 650개 가운데 47개 남고 다 사라졌다. 그 가운데 하나가 포항 덕동마을 세덕사였다. 세덕사 경내에는 임진왜란 의병장 정문부의 정자 용계정이 있었다. 철거 하루 전 덕동 사람들은 하룻밤 사이에 용계정과 서원 본관 사이에 담을 쌓고 문을 내고 정자 뒤쪽에 현판을 새겨 걸었다. 다음 날 아침 세덕사는 사라졌다. 용계정은 인부들이 들고 온 곡괭이 날과 망치 머리를 피했다. 인간이 나서서 선인(先人)의 흔적 운명을 바꾼 것이다.
노천 역사관 구룡포
구룡포 언덕 위에는 조선인이, 언덕 아래 해안가에는 일본인이 살았다. 일본인들은 바다를 메꾸고 마을을 건설했다. 주재소도 학교도 우체국도 주점도 거기 있었다. 하시모토와 도가와 세력은 걸핏하면 어업권을 놓고 싸움을 벌였다. 구룡포 건설이라는 명분 앞에서는 바위처럼 뭉쳤다.
해방이 되고 일본인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목숨 걸고 만든 항구, 자기네 신념의 중심인 신사와 신사로 가는 계단, 살던 집 그대로 두고 돌아갔다. 서상호를 비롯한 대한청년단 단원들은 구룡포를 건설한 일본인 도가와 야스부로 송덕비 비문에 시멘트를 붓고 신사를 파괴했다(송덕비는 도가와 야스부로와 경쟁하던 가가와현 출신 하시모토 젠기치가 세웠다). 신사 건립에 기여한 일본인 이름을 새긴 돌계단 기둥도 돌려세우고 시멘트를 발랐다. 6·25 전쟁 후 신사 자리에 충혼각을 세웠다. 일제 충혼탑 기단 위에 대한민국 충혼탑을 세웠다. 일본 옛 성곽을 닮은 옛 기단에는 일제 때 새긴 글씨와 해방 후 새긴 글씨가 중첩돼 있다.
2017년 구룡포에는 그 역사가 중층으로 쌓여 있다. 언덕 아래 옛 일본인 거리는 말끔하게 복원됐다. 하시모토 젠기치가 살던 집은 근대역사관으로 쓰인다. 돌계단 기둥 120개 가운데 하나는 시멘트를 바르지 않고 온전하다. 그 기둥에 새겨진 이름이 十河彌三郞, 도가와 야스부로다. 시멘트 바른 송덕비도 복구 논의가 진행 중이다. 백 년째 그 거리에 살고 있는 서상호가 말했다. "일본인 거리? 왜 헐어 이걸, 그냥 내버려둬야지."
땅의 역사 삼척 편
14일 10:50 TV조선 방영
1월 14일(토) 오전 10시 50분 종합편성채널 TV조선에서 '땅의 역사 삼척편'이 방송됩니다. 삼척에 남아 있는 역대 왕조 흥망사를 추적합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1/11/201701110029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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