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1.12.24 03:06 | 수정 : 2011.12.26 11:11
神醫냐 돌팔이냐… 구당, 그저 웃었다
"배우 장진영, 침·뜸 계속 받았으면 좋았을 텐데…"
"한국은 참 이상한 나라"
법정서 이겼다고 좋을 게 뭐 있겠습니까
3년이나 말도 안되는 짓을…
한국선 시술 안할 겁니다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486번지 길가에 낡은 4층 건물이 있다. 머지않아 백수(白壽)가 되는 김남수(金南洙·96)옹이 침과 뜸을 베푸는 곳이다. 그는 '구당(灸堂)선생', 그 집은 '구당빌딩'이라 불린다. '뜸뜨는 집'이란 소박한 뜻이다.
구당은 1962년 이후 한의사들의 공적(公敵)이었다. 그해 의료법이 생기면서 침구사(鍼灸士)자격이 없어졌다. 그의 침과 뜸으로 병을 고친 이들은 구당을 '화타(華陀)'같다고 칭송하지만 한의사들은 '무면허 돌팔이'쯤으로 폄하한다.
3년 전부터 구당은 서울시·검찰·경찰에 불려다녔다. 그 와중에 진료도 정지됐다. 뒤엔 역시 한의사들이 있었다. 그런 그가 11월 24일 긴 법적 쟁송의 늪에서 탈출했다. 헌법재판소는 그날 '구당의 뜸은 불법이 아니다'고 선고했다.
이에 앞서 올 8월 3일에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침과 뜸을 일반인에게 가르치는 것이 허용돼야 한다.' 이로써 그는 침과 뜸을 시술하고 다른 사람에게 가르칠 수도 있게 됐다. 당연히 구당과 주변은 환호작약하고 있을 것 같았다.
14일 찾은 구당빌딩은 차분했다. 밖에 걸린 플래카드만 북풍(北風)에 날릴 뿐이었다. 언뜻 거기 적힌 '환영'이란 글자가 보였다. 구당이 담담하게 소회를 밝혔다. "지난 몇년이 우스워요. 환자는 안중에도 없고 그 난리를 쳤으니…."
침·뜸이 만병통치?
死病에는 약도 없습니다…고칠 수 없는 병 분명 있죠
침·뜸은 면역력 키우는 것…제자 양성은 할 겁니다
◇"한국은 우스운 나라입니다"
머지않아 100살이 된다는 게 믿기지 않을 홍안(紅顔)의 노인이 단정한 양복 차림으로 나타났다. 귀에만 보청기를 꼈을 뿐 구당은 3시간가량 대화를 나누는 동안 정력적으로 열변을 쏟아냈다. 목소리가 좁은 방에 쩌렁쩌렁 울려댔다.
―헌재와 대법에서 이겼습니다. 기쁩니까.
"좋을 게 뭐 있겠습니까. 본질은 아픈 사람 병(病) 낫게 해주려는 걸 '낫게 하지 말라'고 시비 건 거잖아요.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어디 있겠어요."
―헌재 결정을 어디서 들었습니까.
"뉴욕에서 환자를 돌보다 소식을 들었어요. 귀국한 건 이달 1일이고요."
―한 달에 열흘씩은 중국에서 진료를 보고 있습니다.
"세계중의학(中醫學)연합회와 올해 협약을 맺었거든요. 북경(北京)에 어방당(御方堂)이라는 진료소가 있어요. 전 그곳 1호실 주치의이자 교수 대우를 받고 있습니다. 다음 달에도 중국에 가야 합니다."
―한의사들은 구당의 무면허(無免許)진료를 비판합니다.
"무면허? 그 말 자체가 잘못된 겁니다. 우리나라에 침구사 자격증이 있나요? 1962년에 의료법이 생기면서 없어진 지 50년이 다 돼갑니다. 침이나 뜸을 교육기관이나 나라에서 가르친 적이 있나요? 시험을 친 적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면허 자체가 없는 건데 무면허라는 게 말이 됩니까?"
―의료법 개정 때 면허 가진 사람이 39명뿐이었습니다. 침사 31명, 침구사가 8명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침구사 면허를 받은 게 1937년입니다. 스물두살 때였어요. 시험 봐서 딴 게 아닙니다. 누군가 '면허를 받아야 한다'면서 군수(郡守)인지 도지사에게 추천해줬어요. 며칠 뒤 가보니 면허증을 주더군요. 그 시절엔 다 그랬어요. 누가 면허증이란 걸 알기나 했겠습니까. 의료법이 바뀔 때 침구학원이 8개나 됐고 과정을 마친 이들이 5000명이나 됐습니다. 그 인력이 법 하나로 다 사장(死藏)됐어요. 처음엔 저항도 해봤지만 그때가 어떤 시절입니까. 군사혁명 직후라 곧 잠잠해졌죠."
―2008년 8월 영업정지 45일을 받은 후부터 뜸뿐 아니라 침 시술도 중단했습니다.
"침과 뜸은 병행해야 합니다. 그래야 효과가 있어요. 그걸 제일 잘 아는 게 전데 어떻게 침만 놔주겠어요. 같이 그만두는 게 옳죠."
―진료할 수 없게 됐을 때 낙담했습니까.
"미국 애틀랜타로 갔어요. 공안과(孔眼科) 다음으로 유명한 한국의사가 세운 호스피스 병원에서 초청받았어요. 그곳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채 1주일을 못 넘긴다더군요. 처음 봤을 때 깜짝 놀랐어요. 눈꺼풀조차 깜박거리지 않는 게 꼭 시체들 같았어요."
―왜 그랬을까요.
"독한 약에 모르핀을 잔뜩 맞았으니 기운이 있을 리 없지요. 그런 사람 중에 10명 정도를 뽑아 침과 뜸을 시술해줬어요. 너무들 잘 먹더라고요. 그때 제 뺨에 구멍 날뻔했어요. 고맙다고 너도나도 뽀뽀를 해줬거든요. 서양의학이 본격적으로 발전한 게 300년 정도인데 그쪽은 균(菌)을 죽이고 수술로 잘라내죠. 침과 뜸은 균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거고요."
―국내에서 다시 시술을 재개할 생각은 없습니까.
"개설(開設)신고만 하면 되는데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직접 진료를 받고 싶으면 중국으로 오셔야 할 겁니다. 전 한국이 참 이상한 나라라고 생각해요. 이런 말도 되지 않는 논쟁을 3년씩이나 해야 하니까요. 제자들 가르치는 건 계속할 생각입니다. 이미 1만명 넘게 배출했거든요."
―법적 공방으로 많이 지친 모양입니다.
"우스운 게, 이번에 뉴욕에서 돌아올 때도 그랬어요. 비행기 안에서 환자가 생겼는데 승무원들이 절 알아본 모양입니다. '선생님께서 좀 봐달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침통이 있어야지. 그거 흉기 취급받아서 비행기에 가지고 탈 수 없잖아요. 안타깝긴 했지만 침 없는 침쟁이가 무슨 소용 있겠어요."
―침을 흉기로도 볼 수 있군요.
"이런 얘기는 꼭 써주세요. 비행기 안에 간단한 수술용구 정도는 비치해놔야 해요. 그래야 갑작스런 환자가 생기면 비상대응을 하죠. 침통도 놔두면 요긴하게 쓰일 겁니다."
안타까운 장진영
시한부 3개월 받고 왔었죠 92일간 침·뜸 하고 효과 봐
영화 찍는다고 기뻐하더니…어찌 보면 내가 죄인입니다
◇"장진영, 죽은 게 아니라 죽인 것이다"
"불과 두세 번의 치료만으로 복부의 종양이 3분의 1로 줄어들어 배가 푹 꺼지고 복수(腹水)도 금세 빠지는 걸 보고 무척 놀랐습니다. 배우 장진영씨가 그간 자침(刺鍼) 2500회, 뜸시술은 1만회를 받았습니다"('침뜸과의 대화' 중에서)
―위암으로 숨진 배우 장진영을 한때 회복시켜 유명해졌습니다.
"내로라하는 유명 병원들이 장진영 치료를 포기했어요. 제게 올 때 시한부 3개월 판정을 받았습니다. 정확히 92일 동안 침과 뜸을 맞고 효과를 봤죠. 밥맛도 되찾고 피로감도 없어졌다고 했어요. 영화 촬영을 재개한다고 들떠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촬영장소를 구경하고 오면서 작은 선물도 들고왔어요."
"그때가 2008년 12월 크리스마스 이후인데 누군가 만류한 거죠.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뜸을 뜨게 해달라'고 매달렸다던데…, 어찌 보면 제가 죄인입니다. 침과 뜸의 효능을 더 알렸어야 했는데."
―안타깝습니다.
"장진영은 참 불쌍한데 이렇게 정리하면 됩니다. '그가 죽었느냐 법과 제도가 죽였느냐'."
노태우 몸속의 침
구당의 제자가 놨다고요? 무슨… 그런 일 없습니다
내가 그분 몸 거동하게끔 몇번 치료한 적은 있죠
―최근에도 구당이 뉴스에 등장했습니다. 중환을 앓는 노태우(盧泰愚) 전 대통령의 몸속에 박힌 침이 '구당의 제자'가 놓은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노태우 대통령은 제가 몇번 치료 해 드린 적이 있어요. 일어나지도 못하던 상태였는데 움직일 수 있게 됐습니다. 전 제가 할 수 있는 건 다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주치의의 뜻에 따르라고 한 뒤엔 가지 않았습니다."
―그분 몸속의 침이 구당의 제자가 놓은 것이란 설(說)은.
"제자는 무슨…. 그런 일 없습니다."
―역대 대통령들을 모두 치료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그런 얘기 자꾸 물으시면…. 노무현 대통령은 허리가 안 좋아 봐드린 적이 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측에선 연락이 왔었지만 안해드렸어요."
―왜요?
"완치가 안되고 자꾸 고통만 연장시키는 것 같아서요."
권력과의 인연
YS는 날 궨한번침궩이라 불러 어깨통증 한번에 고쳐줬죠
김재규 中情부장 때 불면증 얼마 있다 10·26 일으키대요
―김영삼 대통령과도 인연이 있었나요.
"그분은 절 '한번침'선생이라 불렀습니다. 대통령 되기 전에 어깨가 아파서 악수도 못할 정도였는데 제가 한 번에 고쳐 드려 얻은 별명입니다. 대통령이 된 후에도 집무실에서 치료해드린 적이 있습니다."
―10·26사태를 일으킨 김재규(金載圭) 전 중앙정보부장과의 일화도 있지요.
"1979년 봄일 겁니다. 야간 통금(通禁)이 있던 시절인데 자정 넘어 제 집으로 차를 보냈어요. 가보니 이러더군요. '나 잠 좀 자게 해주시오'. 불면증은 한마디로 마음의 병입니다. 심장에 화(火)가 몰리거나 간의 경맥인 족궐음간경(足厥陰肝經)이 흥분해 일어나는 겁니다. 침과 뜸으로 푹 자게 해줬더니 다음날 또 부르더군요. '편히 자니 살 것 같다'면서요. 한동안 정보부장 사택으로 출근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침구사제도가 없어졌다는 소릴 하니 무척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런데요.
"김재규가 '각하가 마음을 바꾸시면 가능할 것 같다. 10월 30일 각하에게 침구사제도 부활을 건의하는 자리를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10월 25일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도 '궁정동에서 회의가 있었는데 부마(釜馬)사태를 마무리하지 못해 내일 삽교천 준공식에 다녀와 다시 회의를 하기로 했다'고 했어요. 그런데 10·26이 일어났으니. 김재규가 나흘만 더 참았어도 침구사제도가 부활될 수 있었을 텐데…."
―기업인들도 많이 진료했겠습니다.
"이름을 일일이 말할 수는 없고요. 가장 기억나는 분은 삼성의 이학수씨입니다. 무릎이 아파 15년을 고생했다는데 침 한번 맞고 호전됐거든요. 다음날 찾아와 '도와드릴 일이 없느냐'고 묻더군요. 전 그게 무슨 뜻인지 몰라 침구사제도를 부활시켜달라고 했는데 나중에 컴퓨터며 노트북이며 저기 있는 에어컨까지 가져다주시더군요."
돈 200억 벌었다고?
침·뜸 유일하게 명맥 잇기에 내가 구박받는 거겠죠
무슨 재주로 내가 200억을…침쟁이는 돈벌 생각하면 안돼
◇"배워서 남 주자"
"나는 중국에 많은 기대를 가져왔어. 중국에 가장 많은 침뜸의학 지식이 축적됐으니까. 거기서 침 좀 놓는다는 분들 다 만나봤는데 제대로 알고 침뜸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지. 이젠 우리식으로 하더라고."('침뜸과의 대화'중에서)
―선생의 말을 들으면 침과 뜸이 만병통치인 것 같습니다.
"만병통치는 아니죠. 옛말에 '사병(死病)에는 약도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고칠 수 없는 병은 분명히 있습니다. 중풍은 두 번째까지는 완치시킬 수 있는데 세 번째 재발하면 치료가 불가능하잖아요. 더 나빠지지 않게 할 수는 있지만요."
―침과 뜸이 왜 효과가 있을까요.
"침과 뜸은 인류 최초의 의학입니다. 사람이 어딘가 가려우면 어떻게 합니까. 손으로 긁거나 꼬집거나 뭔가로 찌르잖아요. 찌르는 게 처음엔 나뭇가지에서 뾰족한 돌로 바뀌었다가 나중에 쇠를 만들게 되면서 침이 된 겁니다. 묘한 게 인간의 몸에 전기가 흐르잖아요. 쇠는 그 전기의 기(氣)를 움직이게 하죠. 그게 바로 침입니다."
―뜸은요.
"쑥의 성분을 몸속에 넣어 병이 낫는다고 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건 잘못 알고 있는 겁니다. 그렇게 쑥이 좋으면 산삼(山蔘)을 쓰지 왜 쑥으로 뜸을 뜨겠어요. 쑥은 발화점(發火點)이 낮아요. 63도 정도로 인체에 닿아도 잠시 따끔할 정돕니다. 뜸을 뜨는 건 작은 상처를 만들기 위한 겁니다. 그러면 진물이 나오는데 거기서 이종(異種) 단백체가 생기면서 몸의 면역력을 크게 높이는 겁니다. 이건 다 과학적으로 증명된 거예요."
―침·뜸의 부작용도 많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구침이라고 침은 아홉 종류가 있어요. 요즘은 제일가는 호침(毫鍼)만 씁니다. 부작용이 생기려야 생길 수 없어요. 요즘 침 맞다 사고 났다는 얘기 들어보신 적 있어요? 뜸을 놓으면 화상(火傷)의 우려가 있다는데 그것도 과장입니다. 정 믿기 힘들면 문 기자한테 내가 직접 뜸 떠줄게요."
―유명하니 질시 받는 거 아닐까요. 침·뜸으로 200억원을 벌었다는 소문도 있고.
"내가 구박받는 건 침과 뜸의 명맥(命脈)을 거의 유일하게 잇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제가 무슨 재주로 200억씩 벌었겠어요. 대지 50평에 건평 100평짜리 이 건물 지을 때도 10억원을 대출받았고 50년 동안 살던 집도 17.5평짜리 연립주택인데. 건물은 들어와 살 욕심 때문에 지은 게 아닙니다. 남의 빌딩 빌려 교육하니 불편한 점이 많았거든요. 침쟁이는 돈 벌 생각하면 절대 안됩니다. "
―그렇다고 공짜로 시술하지는 않지 않습니까.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요. 한의사들은 침 놓는데 1500원 받지만 전 침과 뜸 합해 5만원 받습니다."
―그렇게 많이 받으니 한의사들이 미워하는 것 아닌가요.
"제가 아무 효과도 내지 못하고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을 받았으면 망했거나 굶어죽었겠지요. 전 1주일에 딱 3일만 돈 받고 나머진 무료로 시술했어요. 뜸도 자리만 잡아주고 집에 가서 직접 뜨라고 하죠. 아까 말했잖아요, 평생 남 치료해주다 가는 게 침쟁이라고."
―1984년부터 시작한 봉사활동이 20년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젊었을 땐 침구사제도 되살리려고 투쟁도 많이 했지만 그해 10월부터 방향을 틀었어요. '이젠 사람들에게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제 나이 칠십 땝니다. 경북 성주군과 강원도 원성군에서 처음 시작했어요. 그러다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만든 단체가 지금의 '뜸사랑' 전신(前身)인 애구회(愛灸會)입니다. 2000년 9월 금산 인삼축제 때는 이틀 동안 1800명의 환자에게 봉사한 적도 있어요. 지금은 전국에 침상이 20~30개인 봉사실이 30개나 됩니다. 한 해 봉사해주는 사람이 15만명이 넘고요."
―국회에도 봉사실이 있는데 이름 알리려는 얄팍한 속셈이란 소리도 있습니다.
"제 평생 꿈은 침과 뜸을 모두가 익혀 자기 몸도 보살피고 가족에게도 시술해주는 세상을 보는 겁니다. 내 이름 팔기보다 국회의원들이 침·뜸의 효능을 알면 침구사제도를 보는 시각이 바뀔 것이라는 생각을 한 건 사실입니다."
―'뜸사랑'에서 1년 기간으로 1인당 연 240만원을 받고 교육을 시키는 게 영리목적 아닌가요. 교육을 다 받으면 자체 자격증을 준다는데 그걸 악용할 우려도 있고.
"전 교육비에 한푼이라도 손댄 적이 없어요. '뜸사랑'의 운영과 재정에 절대 간여하지 않도록 독립적인 체제를 만들어놓았지요. 자격증도 봉사할 수 있다는 졸업장 개념이고요. 뜸사랑에서 배우는 이들에게 제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배워서 남주자', 이게 제 신조지요."
"나는 '태백산맥'에 이어 '아리랑'을 3분의 2쯤 쓴 상태에서 오른팔이 마비됐다. 쉴새없이 글을 쓰다 보니 어깨 관절이 마비된 것이다. 왼손으로 글을 쓸 수밖에 없게 된 작가의 불행을 단숨에 해결해 준 은인은 다름아닌…"(조정래)
―한국에서 몰린 구당에게 한의학의 원조인 중국에서 손을 내민 건 아이러닙니다.
"제가 시술하는 침과 뜸에 '정통(正統)'이란 말을 꼭 붙입니다. 중국은 돈벌이에 치중하느라 침을 너무 변형시켜놨더라고요. 뜸도 외형만 요란하게 만들고요. 제가 뜸 뜰 때 쓰는 쑥은 쌀알의 반만 한 크기지요. 뜸을 크게 뜨면 효과가 클 것 같지만 아무런 차이가 없어요. 그렇다면 작은 게 좋은 거죠."
―침과 뜸의 대표는 한국이란 얘깁니까.
"침뜸의 강국은 일본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아주 깊은 연구를 했어요. 규수대학의 하라 시멘타로(原志免太郞) 박사가 뜸과 혈액, 질병치료의 상관관계를 연구했어요. 하지만 그것도 우리나라에서 흘러간 거지요."
―그건 무슨 소립니까.
"요즘 세대들은 허준(許浚)만 아는데 그분은 약(藥)의 대가입니다. 동의보감은 약을 구분해놓은 것이고 침과 뜸에 대해선 뒷부분에 조금밖에 나오지 않아요. 허임 선생이라는 이름 들어본 적 있습니까?"
―허임?
"허준 선생보다 연배는 아래지만 비슷한 시기의 의관으로 활동한 분입니다. '조선 으뜸가는 침의(鍼醫)'로 추앙된 분이었는데 그분이 지은 '침구경험방'이란 책이 굉장히 대단한 겁니다. 일본인들이 그 책을 가져가 공부하면서 비로소 침과 뜸에 대해 눈을 뜨게 된 겁니다."
―선생이 침과 뜸을 접한 게 부친 때문이지요.
"제가 1915년 5월 16일 전남 광산군 하남면에서 태어났어요. 선친(김서중)이 의생 집안의 자손이었습니다. 그런 아버지를 매일 봤고 어려서 침을 가지고 놀았을 정도입니다. 본격적으로 배운 것은 11살 때부터이고 '남수침술원'을 연 게 1943년입니다. 제 나이 스물여덟 때죠."
―그럼 68년 동안 침과 뜸 시술을 해온 셈인데 가장 중요한 게 뭘까요.
"시술하기 전에 환자의 말을 듣고 냄새 맡고 만져보는 것으로 판단합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집중력이지요."
―그러다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제 형님도 침술원을 했는데 망해서 저까지 타격을 받았어요. 알거지가 될 처지여서 올라왔죠. 지금의 삼일빌딩 건너편에서 처음 침술원을 열었어요. 그러다 을지로 6가로 옮겨 한 20년 했고요. 침뜸교육을 그 무렵부터 시작했습니다. 박 대통령 시절에는 단속이 워낙 심해 엄두도 못 냈는데 노태우 대통령 때 완화됐거든요."
―6·25때 침을 놓은 적이 있지요.
"세상에 나가보고 싶었어요. 술 마시고 주정도 해봤고 '노가다'하면서 벽돌, 시멘트도 날라봤지요. 전쟁이 터지면서 미군의 KSC라는 노무사단 안에 있는 의무연대에 들어가 최전방까지 탄환 짊어져서 갖다주고 부상당한 사람 업어오기도 했고요. 의무대에서 침은 못 놓았지만 대신 서양의학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다 휴전돼 다시 침을 잡게 된 겁니다. 술은 그 뒤론 안 해요. 침쟁이에게 제일 금물인 게 술이거든요."
―1남2녀를 두셨는데 그중 두 분이 침·뜸을 한다면서요.
"아들 녀석이 내 곁에 제일 오래 있었지요. 고마운 건 아이들도 침·뜸을 돈벌이로 여기지 않는다고 생각해주는 겁니다. 내가 살아난 것도 그 덕분이라 생각합니다."
―그건 무슨 소린가요.
"1980년에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40일 동안 산소마스크 신세를 졌어요. 6개월 뒤 건강을 되찾았는데 아이들이 제게 해준 침·뜸치료가 결정적이었어요. 남에게 놓다 제가 직접 당해보니 그 효과를 절감하겠더군요."
―시인 김지하가 '신의(神醫)'라 부르는 장병두옹(106) 역시 대법원과 헌재를 상대로 싸움을 계속하고 있으나 판결이 미뤄지는데 지쳐 원주에 칩거하고 있습니다.
"그분 저도 압니다."
구당을 만나기 하루 전 한의사들이 헌재 결정에 반발한다는 소식이 있었다. 면허를 반납하겠다는 숫자가 3500명에 달한다고 한다. 이 싸움은 3년 전 아내와 사별하고 홀로 사는 노인이 살아있는 한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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