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공화국시절 한국 3대요정중의 하나였던 대원각이 오늘의 길상사가 되었다.
대원각의 주인이었던 신지식 기녀출신 김영한이 법정스님의 "무소유"라는 책을 읽고
감명을 받아 대원각(당시 7,000여평, 시가 1,000억원 상당)을 불도량으로
만들어주기를 끈질기게 간청하여 1995년에 길상사가 탄생하였는데,
1997년에는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공덕주 김영한은 법정스님으로부터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을 받았으며,
1999년에 타계하였는데 2년 뒤인 2001년에 경내에 "시주 김영한 공덕비"를 세웠다.
2010년 법정스님이 이곳에서 입적함에 따라 법정스님의 유골과 유품을 전시하고 있는 진영각이 있다.
서울 성북구 성북2동 323번지에 위치한 길상사는 그 사연만큼이나 아름다운 사찰인데
지금은 이렇게 단풍이 곱게 물들어 찾아 온 많은 사람들에게 휴식과 즐거움을 제공하고 있다.
법정 스님은 개원식에서 이렇게 말했다.
“길상사는 가난한 절이면서도 맑고 향기로운 도량이 되었으면 합니다.
불자들만이 아니라 누구나 부담없이 드나들며 마음의 평안과 삶의 지혜를 나눌 수 있었으면 합니다.”
개원식에 참석한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한 종교계 어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해서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가 탄생했다.
길상사 설법전 앞에는 가녀린 모습의 관세음보살상이 서 있다.
천주교 신자인 한국조각계의 거장 서울대 최종태교수가 자청해 빚은 것이다.
또 기독교 신자인 백성학 영안모자 회장이 법정 스님과 길상화 보살의
깊은 뜻을 새긴 7층 석탑을 제작하여 기증하였다.
이 두가지 형상물은 길상사가 종교화합의 상징적인 공간임을 기리고 있다.
길상사 경내에는 수녀들과 목사들이 수시로 찾아온다고 한다.
길상사 창건법회에서 길상화 보살이 이렇게 말했다.
“저는 죄 많은 여자입니다. 저는 불교를 잘 모릅니다만…
저기 보이는 저 팔각정은 여인들이 옷을 갈아입는 곳이었습니다.
제 소원은 저 곳에서 맑고 장엄한 범종소리가 울려퍼지는 것입니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 온 한 여인의 아픔과 슬픔을 넘어선 비원이었다.
길상화 보살은 그 후에도 길상사 시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없는 것을 만들어 드려야 큰일인데 있는 것을 드렸으니 내세울 일이 아니네.”
길상사를 기부한 길상화 김영한과 시인 백석(白石, 백기행)과의 소설같고 운명적인 러브스토리이다.
서울에서 태어난 김영한은 열 여섯살에 집안이 몰락하자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스스로 한성 기생이 되었다.
스물 세살때 흥사단과 조선어학회에서 활동했던 스승 신윤국의 도움으로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하지만 스승이 투옥됐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해 함흥감옥을 찾아가지만 면회를 거절당하게 된다.
신지식 여성에서 다시 기생의 길을 택하게 되었는데,
함흥기생이 되면 지역유지의 도움으로 스승의 모습을 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때 시인 백석(백기행: 북한시인)과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된다.
김영한 보다 네 살 더 많았던 백석은 일본 유학을 마치고 함흥 영생여고 영어교사로 있다가
우연히 만난 기생 김영한과 첫만남에서 그녀의 손을 잡고 다짐한다.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이별은 없을 것”
사랑은 뜨거웠지만 백석의 부모는 기생출신 김영한을 며느리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백석 집안에서는 아들이 기생에게 빠져있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다른 여자와 결혼을 시키게 된다.
그러나 결혼식날 밤 집을 빠져 나온 백석은 영한에게 달려와 만주로 달아나자고 설득하지만
그러나 김영한은 따라 나설 수가 없었다.
백석의 인생길에 걸림돌이 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1939년 백석은 혼자서 만주로 떠났다.
해방을 맞아 백석은 신의주로 돌아왔지만 다시 한국전쟁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서울로 내려간 뒤였기에 만날 수 없었고 그것이 영영 이별이 된다.
결국 두 동강 난 나라 남과 북에서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삶을 살게 되었다.
백석을 그리며 또 기다리며 김영한은 치열하게 살았다.
골짜기에 맑은 물이 흐르는 성북동 배밭골 일대를 사들여 대원각이라는 요정을 열어
재물을 모으고 뒤늦게 대학(중앙대 영문학과)을 졸업하면서 지식을 쌓았다.
모두 백석이 나타나면 그에게 바칠 것들이었다..
평생 백석을 그리워한 김영한은 1996년 2억원을 들여 백석을 기리는 "백석문학상"을 제정하였다.
길상화 김영한은 길상사를 시주한 후에 이렇게 말했다.
"내 모든 재산이 그 사람 시 한 줄만 못해."
'여행사진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남한산성 모처의 단풍 (0) | 2013.11.05 |
---|---|
서울현충원의 가을 풍경 (0) | 2013.11.04 |
역·사광속의 가을풍경 (0) | 2013.10.31 |
스카이72 KLPGA "KB금융 STAR챔피언십" 참관 (0) | 2013.10.25 |
영종도 왕산해수욕장 (0) | 2013.10.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