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람부터 게임 중독]
처음엔 'IT 신동'으로 착각 - 한글 익히고 퀴즈 풀어 '대견'
점차 폭력·선정적 게임 옮겨가… 언어구사 능력은 되레 뒤처져
또래 친구들과도 안 놀아 - 그림책 주니 손가락으로 터치
반응 없자 신경질 내며 던져… 인형·장난감에도 눈길 안 줘
서울에 사는 주부 이자영(가명·35)씨는 아이패드에 푹 빠진 딸 혜인(3)이에게 그림책을 쥐여줬다가 깜짝 놀랐다. 혜인이가 그림책을 손가락으로 터치하고 드래그하는 등 아이패드 다루듯 한 것이다. 그러다가 아이패드처럼 화면전환 같은 반응이 전혀 없자 신경질을 내며 책을 던져버리고는 떼를 쓰며 울었다.
이씨가 아이에게 아이패드를 준 것은 교육 목적이었다. 한글교육용 애플리케이션의 퀴즈게임 등을 이용해 한글을 쉽게 익히도록 하자는 취지였다. 혜인이는 하루에도 몇시간씩 한글 공부에 집중하고 IT기기를 능숙하게 다루는 등 처음에는 성공적으로 보였다. 외출할 때나 손님이 왔을 때에도 아이패드로 조용히 '공부'를 하는 아이가 대견하기까지 했다.
스마트폰·태블릿PC·콘솔게임기 등이 확산되면서 우리 아이들이 게임에 점령 당하고 있다. 말을 배우고, 또래와의 공동생활을 배워야 할 유아들이 '요람'에서부터 게임 중독의 위험에 노출되고 있는 것이다. 처음 기기를 만질 때부터 시간제한 등 관리를 제대로 하면 중독을 막을 수는 있지만, 부모들이 게임중독의 심각성을 모르고 방치하는 사이 아이들은 글을 읽기도 전에 게임 화면이 주는 현란함에 현혹되면서 중독의 길로 접어든다.
김대진 가톨릭대 서울성모병원 교수는 "게임을 하면 즐거움과 쾌락을 주는 호르몬인 도파민의 분비량이 증가하고, 뇌가 여기에 적응되면서 게임할 때 외에는 다른 즐거움을 느낄 수 없게 된다"며 "어른이 돼서도 본능처럼 게임을 찾게 될 위험성이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게임 시작 시기를 가능한 한 늦추는 게 좋다고 말한다. 그러나 게임 시작 연령이 계속 낮아지고 있다.
유아 게임의 내용이 폭력적이거나 선정적이지 않다고 안심해서도 안 된다. 인터넷꿈희망터 이형초 센터장은 "예쁘고 착한 게임이 가장 위험한 게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면서 "실제로 어린 중독자들의 경우 '어린이용' 게임에서 시작해 점차 폭력성과 선정성이 강한 게임으로 옮겨가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잘 인식되지는 않지만 유·소아기의 게임 중독이 청소년이 된 후 심하게 발현되는 경우도 많다. 올해 중학교 2학년이 되는 조모(14)군의 어머니 이모씨는 "10년 전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이라며 매일 가슴을 친다. 4세 때부터 컴퓨터를 능숙하게 다뤘던 조군은 맞벌이인 부모가 방치하는 사이 어릴 때부터 메이플스토리, 스타크래프트 같은 중독성 강한 게임에 몰입했다. 조군의 아버지가 컴퓨터에 비밀번호를 걸면 PC방으로 도망쳤다. 조군의 게임 중독 때문에 이혼위기에까지 몰렸던 이씨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조군의 치료에 전념할 계획이다. 이씨는 "혼자 게임을 하게 하는 건 아이에게 칼을 맡기는 것만큼 위험한 일이라는 걸 이제서야 깨달았다"고 말했다.
아이 뇌가 망가진다 - 조선일보·TV조선 공동기획
가상·현실세계 구분 못해 - 충동 조절하는 전두피질 손상, 참을성 떨어져 툭하면 화내… 생각하기 싫어하고 행동 산만
폭력엔 점점 무뎌져 - 일주일에 15시간 슈팅게임 뇌, 공격성 조절 전두엽 활동 줄어
전 세계적으로 게임이 아이들에게 해로운지 논란은 끊이지 않았다. 게임이 아이들의 창의력과 운동능력을 키운다는 긍정론도 있었지만, 아이의 뇌가 게임으로 망가진다는 반대논리도 거셌다. 논란은 2010년 미국의 대법원에서까지 벌어졌지만, 결론은 나지 않았다. 아동의 뇌에 장기적인 악영향을 미친다는 과학적 증거가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지난해 11월 유력 과학전문지인 네이처가 발행하는 정신의학 전문저널 '트랜스레이셔널 사이키애트리(Translational Psychiatry)'에 게임중독에 빠진 청소년의 뇌가 마약중독에 빠진 것처럼 변했다는 연구결과가 실리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비디오 게임이 뇌를 바꾼다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처음 규명된 것이다.
벨기에 겐트대 시몬 쿤(Kuhn) 박사가 이끈 국제공동연구진은 벨기에·영국·독일·프랑스·아일랜드에서 14세 청소년 154명의 뇌를 촬영했다. 뇌 촬영 결과 조사대상의 평균치(일주일에 9시간)보다 게임을 더 많이 한 청소년의 뇌는 왼쪽 줄무늬체가 훨씬 커져 있었다. 이 부분은 쾌락을 요구하는 뇌의 보상중추로, 마약중독에 빠지면 커진다.
지난 11일 중국 상하이정신건강센터는 '공중과학도서관(PLoS) 원'지에 게임에 빠진 인터넷 중독자들의 뇌에서 백질 손상이 일어났다고 밝혔다. 백질은 감정처리·주의집중·의사결정·인식조절을 담당하는 영역을 연결하는 신경섬유로, 코카인 같은 마약에 중독되면 손상된다.
게임중독이 뇌를 바꾸면 행동도 달라진다. 김영보 가천의대 교수는 "전두엽은 가상과 현실을 구분하고 자극을 자제한다"며 "게임이 주는 단기적인 쾌락자극이 압도적으로 많아지면 전두엽이 정상적인 반응을 하지 못해 잘 참지 못하고 생각하지 않고 행동하는 ADHD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지난해 12월 독일 본대학 연구진은 '생물 심리학'지에 발표한 논문에서 일주일에 평균 15시간 동안 일인칭 슈팅 게임(총기를 조준해 발사하는 게임)을 하면 뇌의 가운데 전두엽 부분이 게임을 하지 않은 사람보다 활동이 약해지는 것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가운데 전두엽은 공포나 공격성을 조절하는 영역이다. 게임이 뇌를 폭력에 둔감하게 만든 것을 실제로 확인한 것이다.
국내 뇌과학자들은 "게임중독은 일방적 규제로는 근원적 해결이 어렵다"며 "정부와 게임업체가 손을 잡고 폭력 게임이 아이들의 뇌에 미치는 영향을 함께 연구하면서 해결책을 찾아나서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전문가가 보는 유아 게임중독]
"부모가 게임중독 심각성 일찍 못깨닫는게 가장 문제
약속한 시간동안만 게임 중요… 게임 매일 30분씩 하기보다
일주일에 1번 90분이 더 낫다, 게임 후 잔상 지우게 해줘야"
- 권장희 소장(사진 왼쪽), 김미영 원장.
지난 19일 서울 송파구 예은유치원에서 열린 유아게임중독 예방교육에서 놀이미디어교육센터 권장희 소장은 "음식쓰레기 옆에 방치된 아이는 그게 뭔지도 모르고 먹게 된다"며 "부모가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유아 게임중독의 가장 큰 원인"이라고 말했다.
권 소장은 "유아기에 부모의 음성을 듣고 반응하면서 타인의 말을 알아듣는 '경청(傾聽) 훈련'을 해야 하는데 이 시기에 자극적이고 중독성이 강한 게임을 접하면 타인의 말에 관심이 없어진다"면서 "유아 때 경청 훈련이 안 된 아이는 학교에 들어가서도 선생님이나 또래의 말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권 소장은 "'밥 먹자'고 서너번 불러도 대답도 않고 게임만 하는 아이를 두고 '집중한다'며 기특해하는 부모도 있다"고 우려했다.
게임을 많이 하는 아이는 타인과 관계 맺기가 안돼 언어발달이 늦어질 수밖에 없다. 아이라라 심리언어상담센터 김미영 원장은 "게임중독 증상이 있는 유아들은 그 부모들도 컴퓨터에 빠져 있는 경우가 많다"며 "부모들부터 컴퓨터 사용 시간을 조절하고, 아이와 함께 인형 만들기, 물놀이 등 다양한 활동을 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유아의 게임중독은 부모의 방치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치료 역시 부모의 관심으로부터 시작돼야 한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정해진 날, 약속한 시간 동안만 게임을 하도록 철저히 관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금요일 저녁에 시계 긴 바늘이 이곳에 올 때까지만 한다"는 식으로 약속하고 아이가 이를 꼭 지키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게임이 끝나기 10분 전에 끝나는 시간을 예고하고, 제시간에 게임을 끝내면 "약속을 잘 지키는 아이구나"라고 칭찬해 동기 부여를 해줘야 한다.
김미영 원장은 "게임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매일 일정 시간 게임을 하는 것보다는 일주일에 한 번 오래 하는 게 더 낫다"며 "게임을 끝낸 후에는 잔상이 남아 다시 하고 싶어지기 때문에 아이가 잔상을 지울 수 있도록 부모가 아이와 함께 다양한 활동을 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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