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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후 40년 살아가는 법] [1] 은퇴 후 40년 살기… 미리 설계하면 장수는 리스크 아닌 축복

惟石정순삼 2012. 1. 2. 02:00

 

[은퇴 후 40년 살아가는 법] [1] 은퇴 40년, 행복 40년
72세 크레인 기사 김문혁씨 - 은퇴 후 11년째 활동 "집에서 논다면 살아있는 시체"
70세 모델 김수신씨 - 여행사 파트타임에 모델 활동 "신인 모델상 어디 없나요"
은퇴자 가구 272만가구 - 7가구 중 1가구꼴… 베이비붐 세대 은퇴 본격화
장수는 공포가 아니다 - 준비없이 닥친 100세 시대,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 느껴
장수를 축복으로 만들도록 생애 설계하고 관리할 때

"내 같은 동네 할배, 뭐 볼 거 있다고 이까지 왔노."

지난 27일 오후
부산 남구 우암동 부둣가. 13m 높이의 크레인 운전석에 앉아 컨테이너박스를 트레일러에 옮겨 싣는 작업을 마치고 내려온 김문혁(72)씨가 헬멧을 벗자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이 날렸다. 얼굴엔 살짝 검버섯이 내려앉았다.

지난 27일 오후 부산 남구 우암동 부둣가에서 13m 높이의 크레인 운전석으로 올라가고 있는 김문혁(72)씨. 그는 “천직이라고 생각한 일이 있다면 죽을 때까지 그 일을 하다가 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용우 기자 yw-kim@chosun.com
그는 젊은 시절 크레인 기사로 15년을 뛰었고, 크레인을 천직으로 생각했지만, 몸담았던 중장비 회사에서 사무직으로 승진해 현장을 떠났다. 1999년 퇴직 후 두 달 집에서 쉬었지만 몸이 근질거렸다. '놀 바엔 차라리 천직이라고 생각한 크레인이나 더 탈까.' 그는 곧바로 후배가 운영하는 중장비 회사로 나가 크레인 운전대를 다시 잡았고, 11년이 흘렀다. 그는 "사지 멀쩡하고 30년 가까이 갈고 닦은 특기들이 다 있을 텐데 은퇴했다고 다 버리고 집에서 팽팽 놀면 그거야말로 '살아있는 시체' 아니냐"고 반문했다.

"허리 펴시고, 허벅지 조이시고. 하나 둘 셋 터언…." 지난 29일 오후 서울 성북구 종암동의 한 모델학교 사무실. 붉은 런웨이에서 2011년 마지막 워킹 실습이 한창이다. 172㎝ 당당한 체격의 김수신씨는 군청색 재킷을 펄럭이며 살짝 윙크를 날렸다. 올해로 70세, 평생 다니던 여행사에서 퇴직한 뒤 10년째다. 가끔 모델 일을 나가면 1회에 20만원 정도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그에겐 돈이 목적이 아니다. 그는 1971년 환타 모델로 신문 지면을 장식했던 적도 있었다. 이후 그는 여행사 직원으로 평생을 살았다. 모델 일로는 가족을 부양할 수 없어서였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은퇴 후엔 매달 국민연금(52만원)을 받고, 여행사에서 가끔 맡겨 주는 파트타임 일을 하며 월 100만원 정도 벌고 있다. 그는 "젊었을 때 꿈을 다시 꾸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일흔 살 모델 김수신(왼쪽에서 두번째)씨가 실버 모델 지망생 동료들과 워킹 실습을 하고 있다. 그는 “내가 받을 수 있는 신인 모델상 어디 없냐”며 웃었다. /이진한 기자 magnum91@chosun.com
얼마 전 102세 할머니가 암 수술을 받았다. 100세 시대가 우리 눈앞으로 성큼 다가온 것이다. 60세에 은퇴한다고 해도 40년을 살아가야 한다. 위 사례의 김문혁·김수신씨는 이 40년을 노년기가 아니라 새로운 중년기로 개척하는 파이오니어들이다.

한국은 지난 40년 동안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 터키를 제외하면 평균 수명이 가장 많이 늘어났다.

게다가 베이비붐세대(1955~1963년생)의 퇴직이 2010년 시작돼 앞으로 은퇴자 가구가 급속도로 늘어날 전망이다. 현재 우리나라 은퇴자 가구는 272만가구(2011년 가계금융조사)로 추산돼 7가구 중 1가구꼴이다. 준비 없이 닥친 100세 시대를 많은 사람들이 공포로 받아들인다. 장수리스크·건강리스크·자녀리스크·물가리스크의 '신4고(新四苦)'가 노인의 전통적인 '4고(가난·고독·질병·무위)'를 대체했다는 말도 나온다.

그러나 장수를 리스크로 받아들이는 것은 너무 소극적인 생각인지 모른다. 한경혜 서울대 노화고령사회연구소 교수는 "장수가 왜 리스크가 돼야 하느냐"면서 "인류는 지금껏 오래 살려고 병을 이겨내는 방법을 연구했고, 돈을 모았고, 행복해지려고 자녀를 키웠는데 왜 그것들을 몽땅 리스크로만 치부해야 하느냐"고 말했다. 강창희 미래에셋 부회장 겸 투자교육연구소장은 "100세 장수는 위험하니 빨리 죽는 게 낫다는 식의 부정적 생각을 가져선 안 된다"며 "100세 장수를 축복으로 만들 수 있도록 생애 설계를 하고 관리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해비타트에서 일하는 권이영(71·오른쪽)씨는 “90살 돼서도 지금처럼 일도 하고 시(詩)도 쓰고 싶다”고 말했다. /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서울 장충동 한국해비타트 본부에서 일하는 권이영(71)씨는 "은퇴는 죽을 때나 하는 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사회 통념상 그는 한국전력기술 상무를 끝으로 1998년 퇴직한 은퇴자이다. 하지만 그는 퇴직 후에도 12년째 매주 월·화·목요일마다 경기도 분당 집에서 7시에 나와 서울로 출근한다. 해비타트는 세계 각지에 집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집을 지어주는 비영리단체다. 권씨는 이 단체가 외국에 보내는 각종 공문들을 번역하거나 꼼꼼하게 손보는 일을 한다. 여기서 받는 월수입 100만원은 그에겐 덤이다. 그는 환갑이 지나 늦깎이로 시집(詩集)을 냈고, 주말엔 성남 문화원에서 시와 수필 쓰는 방법을 가르친다. 그는 한 달 일정이 빼곡히 적힌 다이어리를 꺼내 보여줬다. 그는 "퇴직 후 여러 일에 시간을 쪼개 쓰면서 나도 모르던 잠재력을 발견하는 때가 많아 깜짝깜짝 놀란다"고 말했다.

사실 우리가 흔히 받아들이는 '60대=은퇴'라는 공식도 1930년대
미국에서 우연한 계기로 만들어진 것이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1930년대 뉴딜 정책을 입안하며 연금을 지급하는 은퇴 연령을 62세로 정했는데, 당시 미국인의 평균 수명이 63세였다. 수명은 계속 늘어 80세에 가까워졌는데, 사람들의 머릿속에 박힌 은퇴 연령만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공자(孔子) 시절에 평균 수명은 38세 정도였다. 공자가 말한 불혹(不惑·40세)은 지금으로 치면 80세 정도다. 김문혁·김수신·권이영씨는 아직 불혹 나이에 닿지도 않았다. 100세쯤 돼야 공자 시절의 지천명(知天命)이다.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