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들의 사진사랑 이야기]<6> 소설가 김주영 씨
중국 ‘식사하는 노인’ 2004년.
장소에 가서 자료를 수집하거나 현장에 머물면서 시대적 배경 속에 빠져드는 밑작업을 한다.
그런 다음 마침내 물이 차서 넘치듯 어느 순간 주옥같은 글을 쏟아낸다.
‘샛바람 사이를 긋던 빗방울이 멎자 금방 교교한 달빛이 계곡의 세밭으로 쏟아져 내렸다.
계곡에 널린 돌과 바위들이 차갑게 빛났다.’(‘객주’)
‘타닥타닥하던 장작들 사이에서 유령의 옷자락같이 괴기스러운 연기가, 들녘 밭둑에 뿌리를 내린 키 큰 미루나무처럼 혼자 자라서 시꺼먼 밤빛 속으로 높다랗게 흩어졌다.’(‘멸치’)
‘차창에 스친 바다는, 푸른 색칠을 한 종이 한 장이 바람에 날려와 차창에 붙었다가 순식간에 흩날려 떨어져나간 듯이 내 시선에 잠깐 들어왔다 사라졌을 뿐이다.’(‘빈집’)》
이 문장들을 읽으면 하나의 영상이 떠오르면서 마치 눈앞에 그 모습이 펼쳐진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자연스럽게 독자가 이야기의 무대 속으로 빠져들고 마는 것이다. 이처럼 글이 사람의 심금에 스며들어 쉽게 사라지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 소설의 본질이자 매력이라 말하는 시대의 이야기꾼, 소설가 김주영. 그의 작품 속 세밀한 배경묘사 뒤에는 사진의 역할이 숨어 있다. 소설의 밑그림을 사진으로 직접 찍어왔고 이를 바탕으로 소설에 리얼리티를 더한 작가. 그에게 글과 사진 사이에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지를 물어보았다.
―사진을 하신다는 말을 듣지 못했는데 연륜이 오래되셨다면서요.
“카메라를 처음 구경한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입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시골 면사무소에 취직했던 친구가 샀던 카메라였어요. 우연히도 제가 대학 2학년 때 그 카메라를 친구에게 사면서 카메라를 갖게 되었죠. 그 뒤로 사진을 찍었는데 필름을 자주 살 형편이 못돼 많이는 못 찍었어요. 1971년 ‘휴면기’로 작가로 데뷔한 후 본격적으로 사진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는데 정말 돈만 생기면 카메라를 샀어요. 온갖 액세서리는 물론이고 카메라 가방도 여러 개 장만했고요. 제가 ‘객주’를 연재할 무렵인 1979년에는 카메라만 7대였고 렌즈도 10개 정도 갖고 있었죠. 완전히 사진에 빠져 있었어요. 아쉬운 점은 늘 다른 사람만 찍어주다 보니 내 모습이 찍힌 사진이 하나도 없어요.”
“사진을 해보니 함부로 찍을 것도 아니고 사진기를 많이 갖고 있다고 해서 좋은 사진이 나오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서 전문사진가에게 망원렌즈까지 모두 그냥 줘 버렸어요. 단출하게 2대만 남겼어요.(하지만 그의 사무실 서가 옆에는 롤라이플렉스 이안리플렉스 카메라, 라이카R6, 캐논카메라, 올림푸스카메라 등 알 만한 카메라들이 놓여 있었다. 얼핏 눈에 띄는 것만도 6대. 그 뒤에 다시 늘어났단다.)
최근 답사를 갈 때면 옷보다도 카메라가 더 무거워 육체적으로 너무 고통이 심했어요. 단출하고 가벼우면서 성능이 좋은 디지털카메라를 찾게 되더라고요. 고른 끝에 올림푸스 E-620과 PEN을 작년에 샀어요. 정밀을 요하는 의료기기의 렌즈 대부분이 올림푸스 제품이라는 신문기사를 읽고 성능이 좋을 것 같아서 구입했죠.“
―사진기도 많으니 찍고 싶은 대상도 많았을 텐데 예전에는 주로 어떤 사진을 찍으셨나요.
“‘객주’를 시작할 무렵엔 사진을 엄청나게 찍었죠. 주로 전국 장터의 풍경, 당산나무, 빨래하는 모습, 시장사람들 모습을 많이 찍었어요. 당시엔 사람들 모습을 클로즈업하는 것도 어렵고, 장터 풍경을 컬러로 찍어서 지저분한 느낌이 들어 흑백으로 찍어둘 걸 그랬나 하는 생각도 해보곤 했어요. 요즘 들어 아쉬운 것은 그때 찍은 사진이나 필름이 없다는 겁니다. 작가로서 장터에서 찾아낸 시장사람들의 행동습성이나 장돌뱅이의 언어만 의식했지 사진의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탓에 살림을 옮기고 하면서 다 잃어 버렸습니다.”
―지금까지 사진을 찍으면서 어떤 부분이 가장 어려웠나요.
“실제 피사체가 가지고 있는 특징을 잡아내는 것이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건물도 좋고 인물도 좋은데 어느 각도에서 찍어야 할지. 빛은 이쪽에서 오고 있는데 역광 또는 순광이 나을지, 또 위에서 찍어야 할지 앉아서 위로 보고 찍어야 할지 아니면 엎드려야 할지도 순간적으로 판단이 서질 않았어요. 역광으로 찍어야 피사체의 특징이 잘 나타난다 하더라도 찍히는 피사체와의 관계를 재빨리 설정해 순간포착을 해야 하니까 그것도 힘들고요.
대학 사진학과에서 사진을 배우는데 무슨 4년까지 필요하나 하고 예전에 생각했는데 막상 해보니 사진이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거창한 말로 ‘빛과의 싸움’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사진하는 분들을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현장답사나 자료조사를 중시하는 만큼 직접 글로 현장의 ‘냄새’를 메모해 두시는 줄 알았습니다. 작가에겐 그때의 분위기를 메모하는 게 사진보다 낫지 않나요.
“구체적인 사물, 특히 자연이라든지 사람을 묘사하는 데는 현장을 갔다 왔어도 글 메모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사진은 상상력의 바탕을 제공합니다. 작가는 눈으론 그 사진에 찍혀 있는 네모진 풍경을 바라보지만 머리는 그 사진 바깥으로 사실적으로 연결된 풍경을 상상합니다. 그래야 새로운 이미지와 스토리가 창출됩니다. 인간의 기억이나 글만으로는 한계가 있는 부분을 사진이 채워주는 셈이죠. 잘 찍은 사진 한 장은 상상력의 폭을 훨씬 넓혀줍니다. 최근에 성석제 박상우 구효서 천운영 편해영 씨 같은 많은 작가들이 사진을 찍습니다. 성석제 씨는 ‘농담하는 카메라’, 박상우 씨는 ‘사진과 글’이란 사진 관련 책도 냈습니다. 박상우 씨는 한발 더 나아가 사진이 이제는 문학의 한 영역으로 자리 잡은 또 하나의 표현수단이라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사진을 떠나 작가로서 현장을 다니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요.
“제 작품 중에 ‘쇠둘레를 찾아서’라는 단편이 있습니다. 쇠둘레는 철원이죠. 그곳 이야기인데 그 단편 하나를 쓰기 위해 철원을 3번 갔다 왔어요. ‘객주’는 말할 것도 없고요. 소설의 리얼리티도 문학의 한 측면인데 리얼함을 표현하자면 현장을 가봐야 해요. ‘객주’를 쓰면서 내가 전국 장터를 다 답사했지만 옛날 분위기는 거의 없지요. 그러나 그 장터 자리에서 바라보이는 산천은 물론이고 해가 어느 산에서 떠올라서 어느 쪽으로 진다. 이런 것은 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거죠. 그걸 보고서 그대로 소설에 옮깁니다. 산에 진달래, 철쭉이 피는 시기도 봄의 자연현상이라 잘 변하는 것은 아니죠. 그걸 그대로 옮기면서 작가의 상상력을 더해가는 거죠. 소설에서 무슨 진달래가 필 때는 장맛이 어떻다든지 진달래가 필 적에는 어떤 물건이 잘 팔린다든지 가을이 되면 어떤 물건이 시장에 나온다든지 하는 것은 그렇게 나오는 것이지요.”
―‘멋있는 예술사진’을 찍으시진 않나요. 여러 곳을 다니시다 보면 나도 이런 작품 사진을 찍어봐야겠다고 욕심내실 만한데….
“예전에 장관을 지내신 윤주영 선생님처럼 진지한 사진작업이 사표가 되긴 하지만 사진이 갖는 예술성을 제가 넘보긴 힘들 것 같아요. 한 번은 골프 프로가 나와 골프 시범을 보이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아마추어들이 샷을 할 적에 깃대를 바라보고 샷을 하는데 그건 프로들이 하는 거라는 거예요. ‘그저 그린 중앙에 떨어뜨릴 생각만 해라. 깃대를 보고 치는 건 나중에 프로급이 됐을 때 하는 일이지 건방지게 깃대를 보고 치는 게 아니다.’ 듣기에 따라서는 굉장히 기분 나쁠 수 있는데 저는 그 말이 맞다고 봅니다. 현재 예술사진을 찍겠다 그렇게 대들 수준도 아니고. 앞으로 어떨지는 모르지만 나이도 있는데 지금은 그런 건방진 생각을 가질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현장답사 글 메모만으론 부족
사진보면서 앵글밖 풍경 상상
사진 작업하다 ‘간첩’ 몰리기도
―기본적으로 선생님의 사진작업은 이전에도 소설의 밑그림이었고 앞으로도 그쪽에 초점이 맞춰지겠네요.
“올해 ‘빈집’이라는 소설을 냈습니다. 이 소설에서 개구리들이 이동을 어떻게 한다든지 짝짓기 할 때 작은 개구리 수놈은 어떻게 짝짓기를 할 수 있는지 사진을 찍어 관찰한 다음 작품에 도입했어요. 두 차례의 아프리카 여행을 통해 동물들이 가지고 있는 습성이라든지 자료도 많이 만들었는데 그러한 것들이 제 소설에 생동감과 사실감을 극대화했다고 생각합니다. 리얼한 묘사를 위해 제가 글을 쓰는 한 사진작업은 계속될 겁니다.”
―카메라를 처음 산 시점에서 보면 50여 년이 지났는데 사진과의 인연에서 에피소드도 많을 것 같은데요.
“‘객주’를 쓸 적에 카메라 때문에 두 번이나 봉변을 당했어요. 군포에서 바닷가 갯벌을 찍고 시골다방에 앉아있는데 경찰관 두 명이 등 뒤에 총을 대는 거예요. 그러더니 카메라 가방을 뺏더라고요. 뒤에서 총 대고 옆에서는 나를 잡고 경찰서까지 끌고 갔어요. 가방을 열어보더니 카메라와 무슨 메모가 나오니까 간첩이라는 겁니다. 그때 서울신문에 제가 ‘객주’를 연재할 때니깐 신문사에 전화해서 겨우 풀려났어요. 또 한 번은 충청도 강경의 황산나루에서였어요. 옛날 강경은 굉장히 상업이 번창했던 곳이거든요. 지금은 논산, 강경이지만 일제강점기까지도 강경, 논산이었어요. 거기 나루터에서 번창했던 옛 시절을 떠올리며 배를 타고 몇 차례 오가며 메모하고 사진을 찍었는데 거기서도 간첩으로 신고되어 곤욕을 치뤘습니다.”
―다른 인터뷰 자료를 보니깐 젊은 작가들이 영상매체의 효과를 내기 위해 단어를 공격적으로 쓰고 있다고 나무라셨는데 시대적 트렌드는 아닐까요.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영화화되는 것을 의식하고 쓰는 소설이 많아요. 평면적이냐 입체적이냐 그런 것을 떠나서 이 소설이 영화화됐을 적에 이러저러한 장면들을 연출할 수 있지 않을까 미리 생각하고 쓴 소설이 있거든요. 이는 기술적 문제인 만큼 요즘 젊은 작가들이 갖는 특징이라 생각하고 좋다 나쁘다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나처럼 나이가 든 사람은 젊은 작가들의 그런 모습이 정도를 벗어나 위태롭지 않느냐 그런 생각은 가지고 있죠.”
그의 소설 중 상당수는 떠돌이에 대한 이야기다. 실제로 작품을 위해 한 달 중 절반은 길 위에서 보낸 작가 김주영. 지금도 그의 사무실 책상머리에는 늘 떠날 수 있도록 준비물이 마련돼 있다. 그는 독일을 오가면서 현지 작가들과 13년간 교류한 끝에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서 우리나라가 주빈국이 되는 데 기여했고 지금은 중국에 공을 들이고 있다. 중국작가들과 성(省) 단위 교류를 하기 위해 중국을 자주 드나든다. ‘김주영표’ 문화사업인 셈이다.
“교류한 지 3년째밖에 되지 않았는데 한 10년 되면 백서 하나는 나오겠죠? 현재까지 성과라면 우리 작가들의 작품이 중국어로 많이 번역, 출간되었다는 거죠.”
‘길 위의 작가’로 불리는 김주영. 그는 여전히 길 위를 떠돌며 뭔가를 찾고 있다.
서영수 전문기자 kuk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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