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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촬영이야기

[김윤덕의 사람人] 6명의 대통령을 찍은 사진가 '란 스튜디오' 김재환 회장

惟石정순삼 2011. 4. 17. 09:19

"예술? 내 사진은 역사다"

눈물로 베개를 흥건히 적셔본 적 없다면 사나이가 아니다, 안 되는 일 되게 하리란 투지 없이 성공을 꿈꾸지 말라….

20세기식 구닥다리 경구를 여태 가슴 한복판에 새기고 산다. '꼴통' '히틀러' 소릴 들어도 그 고집 꺾은 적 없다. 내년이면 30주년을 맞는 '란(蘭)스튜디오' 김재환(金在煥·59) 회장 얘기다.

골목길 동네 사진관을 기업 규모로 발전시킨 한국 사진업계의 전설. 중졸 학력으로 '허바허바사진관',
신라호텔 '황실사진관'을 거쳐 스물여덟 살 때 청와대에 입성, 전두환부터 이명박까지 6명의 전·현직 대통령을 최근접 수행하며 촬영한 국내 최고의 인물사진가다. 부시, 고르바초프, 엘리자베스 여왕을 수행 촬영했고 유엔기를 배경으로 미소 짓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사진, 대도(大盜) 조세형의 결혼식 사진도 그가 찍었다. 명성만큼 논란도 많았다. 권력을 좇는 사진가, '여당 스튜디오'라는 오명(汚名). 그의 출세 전략이었던 '귀족주의' 마케팅은 '상류사회 사람들만 넘나들 수 있는 문턱 높은 사진관'이라는 비난을 샀다.

동네 사진관을 기업화시킨 김재환 회장의 성공 비결은 두 눈에 있었다. “불을 보고서라도 뛰어들 수 있다”는 맹렬한 눈빛과 지독하리만치 철저한 자기 관리는 중졸 학력의 그를 사진업계의 전설로 만들었다. / 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디카'의 무차별 공세에도 6개의 지점을 거느리며 건재를 과시하는 비결이 궁금해 12일, 서울 남산 본사를 찾았다. 160㎝가 채 될 것 같지 않은 단신(短身)에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듯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그는, 주름 한 줄 없이 빳빳하게 다린 베이지색 면바지가 구겨질까 봐 소파 대신 사무용 의자에 앉았다. 그에게 물었다. "당신이 찍어온 사진은 예술인가?" 김재환이 답했다. "내 사진은 역사다."

이회창 총재가 대통령 못 된 이유

―대통령 다섯 분의 존영(尊影)을 촬영했다. 초등학교 교실에 걸려 있던 전두환 대통령 사진이 이제 보니 김재환 작품이었다.

"허바허바사진관에서 일할 때
국방부를 출입했다. 별 하나(준장) 때 전 대통령을 처음 뵈었다. 신라호텔 황실사진관에 있을 땐 여사님(이순자)을 찍었다. 그런저런 인연이 얽혀 대통령 되신 후 의전 사진가가 되었다."

―카메라 앵글을 통해 본 대통령 전두환은 어떤 사람이었나.

"역사의 평가를 떠나, 소탈한 남자라고 느꼈다. '의리' 하면 그분 따를 사람 있겠나.(웃음) 최근에도 연희동 가서 담소 나눴을 만큼, 일개 사진 찍는 사람이라도 한번 맺은 인연 깊게 이어 가시더라."

―사진 찍기 제일 좋은 대통령은 누구였나.

"
노태우 대통령이 가장 핸섬(handsome)했지. 귀가 크고 이마도 넓고. 김대중 대통령도 호남(好男)형이라 사진 찍기 편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양옆으로 올라간 입꼬리가 핸디캡이어서 인화할 때 수정 작업을 반드시 했다. 존영을 찍진 않았지만 이명박 대통령이 사진 촬영하기 가장 힘든 케이스다. 얼굴에 맺히는 굴곡이 없고 하관이 없어서. 그런 경우는 메이크업을 아주 엷게 해야 하는데, TV 나오실 때 보면 좀 강하다는 느낌이 든다."

―노태우 대통령은 후보 시절 선거 벽보부터 제작했다.

"노 후보 캐치프레이즈가 '보통사람'이었다. 홍보책임자가 어떤 이미지로 촬영할까 고민하기에 내가 '집으로 가자' 했다. 노 후보는 아들과 바둑을 두고 여사님은 옆에서 과일 깎게 한 다음 사진을 찍었다. 지도자의 사진은 따뜻한 눈빛이 관건이다."

―김대중 대통령도 후보 시절부터 찍었다.

"오랜 단골이던 이종찬 전 안기부장 소개로 뵙게 됐다. 솔직히 (김 대통령에겐) 좋지 않은 편견이 있었는데, 그 오뚝이 정신을 보고 존경하게 됐다. 퇴임 때만 하더라도 '얼마 못 사시겠다' 생각했을 만큼 노쇠하셨는데, 이후 더 왕성한 활동 하시는 걸 보고 괜히 거물이 아니구나 싶더라."


나는 대통령의 사진가

촬영 두시간 전에 도착해 세팅… 지도자 사진은 따뜻한 눈빛이 관건
국가행사 때는 가장 좋은 양복 입어… 카메라맨은 뒷모습이 아름다워야…


―김종필·이회창 등 대통령이 되지 못한 정치인들도 촬영했나?

"내가 농담으로,
이회창 후보는 김재환한테 사진을 찍지 않아서 당선되지 못했다고 한다.(웃음) 근접 촬영하진 않았지만 김종필 총재는 최고의 미남 정치인 중 한 사람이다."

―수행한 외국 정상들 중에는 누가 기억에 남나?

"고르바초프 대통령. 노태우 대통령과의 제주 정상회담으로 시작해 한국 오실 때마다 촬영했다. 퇴임 후 그분 연구소로 초청받은 적이 있는데, 보드카에 맥주를 섞은 '폭탄주'를 내놓으시더라. 한국 문화를 굉장히 좋아하셨다."

―반(半)은 정치인으로 살아야 했겠다.

"선거 철만 되면 우리 스튜디오로 모든 후보들이 사진 작업을 의뢰해 와서 나와 직원들이 각 진영으로 총출동했다. 우리 카메라 앞에 여야는 없다. 정파도, 계파도 없다. 우리는 가장 프로페셔널한 방식으로 고객의 요구를 채워줄 뿐이다. 대중에 가장 어필할 수 있는 사진을 뽑아내려 최선을 다했다."

―'로비의 귀재'는 아니었을까.

"나는 명함 100장을 찍으면 6개월이 지나도 줄어들지 않을 만큼 낯가림이 심한 사람이다. 실력이 없으면 인맥도 통하지 않는다. 국가행사를 촬영할 때 난 가장 좋은 양복을 입는다. 카메라 가방도 메지 않는다. 경호원도 움직일 수 없는 행사장에서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카메라맨은 뒷모습이 아름다워야 한다. 대통령을 그림자처럼 따르고, 그런 내 뒤를 조수가 또 그림자처럼 따른다. 내가 조수를 향해 엄지와 검지를 펴면 105㎜ 스탠더드 렌즈를 건네라는 사인이다. 다섯 손가락을 다 펴면 200㎜를 달라는 뜻이고. 다 쓴 렌즈를 뒤로 던지면 조수는 그걸 날렵하게 받아야 한다. 이 모든 과정이 그림처럼 이뤄져야 한다."

니콘 F2 가지고 시작한 여권 전문사진관

―사진업계 '명장'이 되기까지 입지전적 삶을 살았다. 전북 정읍 출생, 부모의 사업이 망해 중학교만 졸업한 뒤
한국전력 사환으로 일하다, 서울 장위동 사진관에 조수로 들어갔고, 열일곱 살에 처음 카메라를 만진다.

"쎄빠지게 고생했지. 집사람은 아들놈 장가도 보내야 하는데 어디 가서 구질구질한 얘기 좀 하지 말라고 성화지만, 그렇다고 거짓말할 수 있나(웃음). 눈물 젖은 밥 숱하게 먹었다. 아니 굶기를 밥 먹듯 하니 체중이 40㎏이 안 됐고, 그래서 그토록 동경했던 군대에도 못 갔다."

―사진기술은 어떻게 습득했나.

"월남전·중동건설붐을 계기로 우리나라에 사진 바람이 불었다. 군인들 돌아올 때 전자제품 하나씩 소지했고,
사우디에서 돌아오는 근로자들이 일본 카메라를 메고 들어왔다. 사진관에서 허드렛일 하면서 사진에 관한 것이라면 닥치는 대로 읽었다. 아사히 펜텍스 카메라, 니콘의 홍보용 책자를 달달 외웠다. 일 끝나면 중앙극장 앞에 있던 사진학원으로 갔다. 싹수가 보였던지, 학원 교사가 허바허바사진관으로 날 데려갔다. 당시 허바허바는 국가 행사의 대부분을 촬영하고 있었는데, 거기서 국방부와 육군사관학교를 출입했다. 그때부터 군인·정치인과의 인맥을 쌓은 셈이다."

‘DJP 연합’으로 상징되는 1997년 15대 대선 당시 김대중 후보 진영의 요청으로 찍은 사진. 일반대중에는 공개되지 않았지만, 기라성 같은 한국 정치인들의 얼굴이 곳곳에 보이는 이 사진을 김재환 회장은 자신의 역작 중 하나로 소개했다. / 란 스튜디오 제공

―허바허바에서 신라호텔 황실 사진관으로 스카우트됐다.

"신라호텔에서 VIP들에 대한 의전을 배운 셈이다. 호텔에 온 국내외 유명 정치인, 기업인들의 인물사진을 수없이 찍었다. 호텔 부장으로 있을 때 청와대와도 인연을 맺었다."

―그런데 돌연 호텔에 사표를 내고 중동으로 떠났다.

"국제그룹 어르신(
양정모 회장)이 추천해 국제종합건설 홍보담당으로 옮겼다. 중동에 가고 싶어서였다. 큰 세계를 보고 싶었다. 그런데 몇 년 지나자 그것도 시큰둥해지더라. 속된 말로 내가 학벌이 있나, 명성이 있나. 경쟁 치열한 기업에서 승진해봤자 부장일 텐데 그럴 바에야 구멍가게라도 내 사진관을 갖자 결심했다."


여당 스튜디오?

선거철만 되면 모든 후보 몰려…  카메라 앞엔 여야·정파·계파 없어…
가장 프로페셔널한 방법으로 대중에 어필할 수 있는 사진 뽑아줘


―처음엔 여권사진 찍는 사진관이었다.

"수송동 골목에서 니콘 F2 한 대 가지고 시작했다. 국제그룹에서 중동 가는 직원들 여권사진을 우리 집에 몰아주셔서 자리를 잡았다. 그때부터 간판이 '란(蘭)'이었다. 세계 모든 특급호텔에 오키드(orchid)룸이 있지 않나. 그만큼 청초하고 향기롭고 선비의 상징이고. 나는 내 사진관을 호텔 부럽지 않은 멋진 공간으로 만들고 싶었다. 꿈이 컸다."

大盜 조세형? "내겐 도둑도 고객이다"

―허바허바·황실 등 유명 사진관들이 있는데 다시 청와대를 꿰차고 들어갔다.

"좋게 인연 맺어놓은 분들이 나를 다시 찾으시더라."

―그게 인정이나 인연으로 될 일인가?

"당시 청와대에서는 대통령 존영을 찍거나 의전촬영을 할 때 두 개 업체를 경쟁시켰다. 그 중 한 업체로 선정되면 나는 촬영 2시간 전에 도착해 완벽한 세팅을 해놓고 대통령을 기다렸다. 촬영 후 홍보수석이 사진은 언제쯤 나오느냐 물으면, 공직사회 언어로 '내일 17시 30분까지 보고하겠습니다' 했다.(웃음) 경쟁사 사진사가 '저희는 들어가 봐야 알겠는데요' 하면 게임은 끝이었다. 17시 30분이라고 했어도 그보다 1시간 먼저 와서 보고했다. 돈이든 물건이든 약속시간보다 빨리 보여줘야 상대가 기쁘지 않겠나. 그런 처세를 허바와 신라호텔, 국제그룹에서 배웠다."

―혹자는 김재환을 '타고난 비서'라고 하더라.

"나는 고객이 뭘 원하는지 끊임없이 찾았다. 촬영 중 알게 된 고객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절대 함구했고, 그들 됨됨이를 공식적으로 평가하지도 않았다. 촬영 있는 날엔 김치도 먹지 않는다. 의상도 중요하다. 내겐 구두 50족, 와이셔츠 50벌, 양복 30벌이 있다. 옷이 구겨질까 봐 푹신한 소파에도 앉지 않는다. 요즘도 예식장에 가면 점퍼때기 걸친 사진사가 손가락으로 하객들을 가리키며 이리 가라, 저리 가라 명령하던데, 천하에 배워먹지 못한 놈들이다."

―대도(大盜) 조세형의 결혼식 사진을 둘러싼 일화도 그 '비서 정신'과 관련 있나.

"결혼 후 새 삶을 찾았다던 조세형씨가 다시 사고를 치니까 언론사마다 나에게 결혼식 필름을 달라고 아우성치더라. 내겐 도둑도 고객이다. 기자들이 독한 놈이라고 날 욕했지만 제공하지 않았다."

―란스튜디오는 사진사관학교로도 '악명'이 높다.

"지금도 나는 '못한다'소리 하는 놈들이 제일 싫다. 어떻게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인생을 사나? 지금도 불시에 각 지점을 방문해 직원들 찍어놓은 사진들을 모니터하는데, 개차반으로 찍었다가 걸리면 '축 사망'이다. 국가든, 한 개인이든 역사를 기록해야 할 사진장이들이 책도 안 읽고 신문도 안 읽는다. 야트막한 기술에만 매달리고 컴퓨터 앞에 앉아 마우스만 굴린다. 이러니 나한테 안 맞고 배기나? 사진이 왜 이 모양이냐고 물었을 때 고객 탓하는 놈은 더 맞는다."

―요즘 시대에 스파르타식 교육이 통하겠나?

"나는 군인정신을 좋아한다. 안 되는 걸 되게 하라. 내가 택시기사가 되었다면 대통령 모시는 기사처럼 운전했을 거다."

'명품'은 아날로그에서 나온다

―내년이 란스튜디오 30주년이다. 여전히 필름 촬영이 70%라던데, 건재할 수 있었던 비결이 뭘까.

"모든 자영업자들이 휘청거리는데, 우리라고 별 수 있나. 직영점 8개까지 냈다가 6개로 줄였다. '추억의 사진관'을 기업화해온 노력이 30년을 눈앞에 두고 제동이 걸린 느낌이라 솔직히 심란하다."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 사진관이 현상유지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움이다.

"수익을 말하는 게 아니다. 사회가 전부 디지털화·퓨전화 되니까 한 길을 걸어온 전문가들이 '구식'이라 홀대받고 소외되는 느낌이다. 사진만 해도 기계가 할 수 있는 게 있고, 사람의 정신이 파고들 수 있는 자리가 따로 있는데 다들 손쉬운 기술에만 매달린다."


노태우·김대중 대통령 사진 찍기에 편한 얼굴
김영삼 대통령은 입꼬리가 핸디캡… 인화할 때 늘 수정작업 거쳐야
굴곡없는 이명박 대통령 얼굴 촬영하기 힘든 케이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지 않나? 똑딱이 디카로 찍어도 컴퓨터가 다 '뽀샵(포토샵)' 처리해주던데.

"정신이 깃든 상품을 우리는 명품이라고 한다. 명품은 아날로그에서 나온다. 피사체와 교감할 시간, 나의 생각을 심을 시간, 최고의 순간을 포착할 시간이 있어야 하지 않나. 맘만 먹으면 눈 가리고 아웅 할 수 있다. 아류(프랜차이즈) 만들어 쉽게 돈 벌 수 있다. 하지만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기록의 산물인 사진은 100년을 가야 하는 명품이어야 한다."

―인물사진·가족사진에 '명품'이랄 게 있을까?

"유섭 카쉬가 찍은 윈스턴 처칠의 사진을 봤나? 사진사에게 시가를 빼앗긴 뒤 두 눈을 부릅뜬 처칠의 화난 표정을 그대로 찍은 사진. 그 인물의 성품, 문화, 향기가 배어 나오는 사진이 명품이다."

―좋게 보면 '고전적'이고, 나쁘게 보면 '구식'인 란스튜디오의 사진을 사람들은 왜 좋아할까.

"(스튜디오에 걸려 있던 영화배우
신영균씨 사진을 가리키며) 이 사진을 봐라. 양복 소매와 황색 피부 사이에 흰색 와이셔츠 소매가 살짝 나와 있지 않나. 그래서 우아한 거다. 표정을 봐라. 당신 또한 행복해지지 않나. 머리부터 발끝까지 디테일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노력한다. 피사체를 가장 아름답게, 품위있게 표현할 수 있는 노하우가 내게는 있다."

―김재환은 몰라도 조세현·김중만을 아는 사람은 많다.

"나는 대통령의 사진을 찍어온 사람이다. 국가 최고지도자의 이·취임식 현장을, 우리 군대의 역사를 찍어온 사람이다. '작가'라 불리지 않아도 좋다. 내 눈을 봐라. 내세울 것 없는 체격을 극복하기 위해 나는 이 눈을 가지고 살았다. 불을 보고라도 뛰어들 수 있는 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