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겁게 살아가는 중년 삶의 이야기

고향하동이야기

[Music Episode]물레방아 도는데

惟石정순삼 2010. 12. 17. 14:47

 

[Music Episode]물레방아 도는데
작사가 정두수 씨 일제 때 전쟁터로 떠난 막내 삼촌 그려..
하동군 고전면 성평리 마을 물레방아 노래 상징물로 등장
징집으로 헤어진 고향, 부모, 동네 애인 이별의 아픔 물씬

(1절)
돌담길 돌아서며 또 한 번 보고 징검다리 건너갈 때 뒤돌아보며 서울로 떠나간 사람 천리타향 멀리 가더니 새봄이 오기 전에 잊어버렸나 고향의 물레방아 오늘도 돌아가는데

(2절)
두 손을 마주 잡고 아쉬워하며 골목길을 돌아설 때 손을 흔들며 서울로 떠나간 사람 천리타향 멀리 가더니 가을이 다가도록 소식도 없네 고향의 물레방아 오늘도 돌아가는데


정두수 작사, 박춘석 작곡, 나훈아 노래의 <물레방아 도는데>는 언제 들어도 가슴이 아려오는 듯한 가요다. 돌담길, 징검다리, 새봄, 고향, 물레방아 등 정감 넘치는 노랫말이 감칠맛을 더해주며 푸근하게 다가온다. 고향을 등에 두고 떠난 연인을 그리는 애잔함도 묻어난다.


4분의 4박자, 트로트풍의 이 노래는 일제강점기 때 장래를 약속한 청춘남녀의 이별을 소재로 태어났다. 1944년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벌이면서 연합군에 맹공격을 당해 최후 발악하며 젊은 학생들을 사지로 내몰던 무렵 태어난 것이다.
노랫말은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경남 하동출신 작사가 정두수씨(본명 정두채, 시인 정공채 선생 동생)의 막내삼촌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장소는 하동군 고전면 성평리 마을. 정 작사가의 삼촌은 일본 와세다대 1학년을 다니다 일제로부터 강제징집명령을 받았다.

 
그 때 그는 어머니와 동네 애인이던 순이의 손을 놓고 집을 떠나며 집 앞의 개울 징검다리를 건너갔다. 고향 집을 떠난 그는 이별의 아쉬움에 어머니와 순이를 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전장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는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전쟁터에서 숨져 이듬해 한줌의 재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 그의 죽음은 부모와 애인(순이)에게 눈물과 한을 안겼다. 허탈해진 어머니는 아들의 무사귀환을 산신령께 빌었던 마을 뒤 금오산만 쳐다볼 뿐이었다.


훗날 서울로 올라온 정두수 씨는 그때의 삼촌을 떠올리며 노랫말을 만들었다. ‘돌담길 돌아서며 또 한 번 보고 징검다리 건너갈 때 뒤돌아보며~’ 영화의 장면처럼 이별의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진다. 전쟁터로 불려가며 부모, 애인과의 헤어짐이 아쉬워 몇 번이고 자꾸 뒤돌아보며 발걸음을 뗀 삼촌의 입대모습을 생생하게 그린 것이다.


그러나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던가. 반세기도 더 지난 지금의 노래 배경지역은 너무나 많이 바뀌었다. 마을돌담길은 2차선 아스팔트포장도로가 됐다. 또 담장은 벽돌로 대신 됐지만 마을 곳곳엔 예전의 돌담을 찾을 수 있다. 동네 앞 징검다리는 없어지고 현대식 다리 주교천이 들어섰다. 노래 상징물이 된 마을의 물레방아는 꽤 낡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돌아가다 헐려 없어졌다. 동구 밖 철탑아래 있었던 그 물레방아는 다만 우리들 마음속에서 오늘도 쉼 없이 돌아가고 있다.
게다가 80대가 된 순이씨는 홀로 징검다리 자리를 바라보며 ‘가신 그분’을 생각하고 있다는 후문이다. 사랑했던 임은 갔지만 사랑을 나눴던 물레방아, 고향의 개울물은 노래와 함께 그의 마음속에 변함없이 흐르고 있는 것이다.


주옥의 노랫말을 만든 정두수 씨는 1937년 4월 18일 하동에서 태어났다. 1956년 부산 동래고 재학 때 동인지 ‘올벼’ 동인으로 문학세계에 뛰어들었다. 1960년 서라벌예대 문창과에 다니면서 시 <백두대간> <지리산> <섬진강> <하동포구 이야기> <망월대> 등을 썼다. 1962년 방송가요 <즐거운 여름> <포푸라가 있는 길> <강물 따라 왔는데> 등을 발표했다.또 덕수궁 돌담길, 흑산도아가씨, 가슴 아프게, 물레방아 도는데, 하동포구아가씨, 마포종점, 공항의 이별, 과거는 흘러갔다, 노신사, 마음 약해서, 잊기로 했네, 밤에 가겠소, 정아, 시오리 솔밭길, 노량대교, 없었던 일로해요, 하동으로 오세요, 그 사람 바보야요, 목화아가씨, 우수, 내 고향 남촌, 빗속에서 누가 우나, 삼백리 한려수도 등 4,000여 편의 노랫말을 지었다. 1969년 정두수 작사교실을 세워 김지평, 김병길, 박영아, 심재현, 정태권, 김상길씨 등을 배출했다. 하동군민상, 국제가요작사상, 제1회 한국예술윤리위원회 본상, 제1회 한국가요상 작사상, 무궁화대상, 방송가요대상, 한국문학예술상, 대한민국 연예공로상 등 50여 수상기록이 그의 실력을 말해준다. 알기 쉬운 작사법, 한국걸작가요 해설 등의 저서가 있고 한국가요대전집, 명시의 고향, 한국가곡 대전집, 제1회 정두수가요제 기념음반 10집 등이 있다.


그의 글엔 장엄한 지리산 정기와 넉넉한 섬진강의 정서가 녹아있다. 1964년 서라벌 예대 문창과를 졸업, 잡지사 기자로 3년간 뛰었고 MBC 방송스크립터로도 활동했다. 그러던 중 그가 작사한 <덕수궁 돌담길>이 크게 히트하면서 작사가의 길로 들었다. 당시 시 한편 원고료가 300원인 반면 노래작사 한 편은 2000원이 넘었다. 그는 갈등 끝에 지구레코드사 전속작사가가 됐다. 그 무렵 그는 펜을 들기만 하면 가사가 술술 흘러나와 한 달에 30여 편의 작사를 했다. 국내 최다작사가 기록도 갖고 있다. 경기도 광주 초월읍의 아파트 15층에 살고 있는 그의 집엔 각종 자료들로 꽉 차있다. 2006년 가을 수술을 받고 거의 칩거 중이다.


그의 노래비는 전국 15개나 세워져 있다. 고향인 하동군 고전면 성평리 주교천변 600여 평의 터에 ‘정두수 노래비공원’이 조성됐다. 80년 전과 같은 물레방아를 재현했고 <물레방아 도는데>, <시오리 솔밭길> 노래비와 정자, 디딜방아, 연못 등을 곁들여 그가 우리나라 작사계 거목이란 것을 입증이라도 하듯 반듯한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 공원엔 특히 그의 노래를 부른 국민가수 나훈아의 팬클럽회원 3000여 명이 노래비를 관람키 위해 이곳을 다녀간 것을 비롯해 많은 관람객들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에 힘입어 하동군은 ‘정두수 가요제’를 열었고, 기금을 더 만들어 인근 2000여 평을 더 사서 공원 확장에 나선다. 그의 선친은 큰 아들 정공채 시인에게 공자와 같은 품성으로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에서 ‘공채’, 작은 아들에겐 두보와 같은 문장가가 되라고 ‘두채’라 이름을 지었다. 경희대 성악과 출신의 부인 이영화 여사는 그 눈빛만큼이나 마음의 품도 깊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