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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도 걸어보니 마치 임금님이 된 기분이네”

惟石정순삼 2010. 8. 27. 07:04

“어도 걸어보니 마치 임금님이 된 기분이네”

근정전과 왕실을 지키는 신령스러운 동물상.

 

“아빠, 새로 복원된 광화문 보셨어요?”

 “그 앞을 지나다니기는 했지만 제대로 보지 못했네. 말 나온 김에 한번 가자고. 경회루도 공개했다니까 올라가 보고.”

 3년 8개월가량의 복원 공사를 마친 광화문을 먼저 둘러보았다. 더 웅장하고 산뜻해 보였다. 경복궁 정문이지만 조선의 역사만큼이나 아픔이 많은 문이다. 임진왜란 때는 궁궐과 함께 불탔고 일제 때는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6·25전쟁 때는 누각이 소실됐다.

 “광화문 복원은 1968년 철근 콘크리트 구조로 복원되면서 조선총독부 중심축에 맞춰 건립된 문을 원위치한 거지. 그 결과 광화문-흥례문-근정문으로 이어지는 직선축이 되살아났어. 육중하고 당당한 화강암 석축, 처마선이 날렵한 누각으로 1865년 당시 모습을 되찾았어.”

 경복궁은 조선 태조에서 선조 때까지, 그리고 고종 임금의 자취가 묻은 궁이다. 조선 전반부의 역사와 조선 말의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권력과 왕의 일상을 중심으로 경복궁을 살펴보면 어떨까? 옛날이나 지금이나 권좌를 둘러싼 싸움은 치열했어. 근정전으로 가 보자.”

 근정전은 왕의 즉위식, 문무백관 조회, 외국 사절 접견 등 국가적 행사를 치르던 곳이다. ‘부지런 하여 잘 다스리는 곳’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궐 안에서 가장 장엄한 건물로 왕권을 상징한다.


왕이 연회를 주재하던 경회루.



 “왕들에게는 좀 미안하지만 여기는 왕이 가장 폼을 잡을 수 있는 곳이야. 품계석 앞에 도열한 신하들을 내려다보면서 군기를 좀 잡았어.”

 근정전 마당에는 햇빛의 반사를 줄이기 위해 거칠게 다듬은 화강암이 깔려 있다. 마당 가운데는 주변보다 약간 위로 올라온 길이 있다. 왕만이 다니는 어도(御道)다. 어도 좌우에는 신하들이 직급별로 설 수 있도록 품계석이 서 있다. 모든 신하들이 참석하는 정기 조회는 한 달에 4번씩 열렸다.

 “즉위식을 올리면서도 가슴 찔리는 왕이 있었지. 누군지 알겠어?”

 “‘왕자의 난’으로 동생들을 죽인 태종과 나이 어린 조카를 죽인 세조죠.”

 “맞아. 그 당시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을 거야. 동양이나 서양에서나 권력은 인정사정이 없어. 그런데 그들에게 물어보면 또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거야. 핑계 없는 무덤은 없는 거니까.”

 사정전은 왕의 공식 집무실이다. 깊이 생각해 옳고 그름을 가린다는 뜻이 담겨 있다. 매일 아침 업무보고와 회의, 경연(經筵) 등이 이곳에서 벌어졌다. 경연은 국왕을 위한 교육 겸 국정 세미나인 셈이다.

흥례문. 광화문과 근정문 사이 중문으로 일제가 조선총독부 건물을

세우면서 철거한 지 85년 만에 복원된 문이다.


 “혹시 나으리 소리 안들리냐?”

 “무슨 소리예요?”

 “세조가 단종 복위를 꾀하던 신하들을 바로 이 뜰에서 중죄인을 직접 신문했거든. 세조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수양대군 나으리’라고 했으니 대단한 분들이야. 내 귀에는 지금도 ‘나으리’ 소리가 들리네.”

 “혹시 숙주나물 보이나 잘 보세요.” 변절한 신숙주를 잘도 기억해 내는 범이의 반격이다.

 “알았어. 경회루로 가자. 모처럼 안으로 들여보내 준다니.”

 경회루는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운 건물이다. 왕이 신하들과 큰 연회를 주재하거나 외국 사신을 접대하던 곳이다. 여기에도 권력을 둘러싼 눈물은 있다.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옥새를 넘겨 준 곳이다.

 중종이 가끔 경회루에서 폐위된 부인 신씨가 사는 인왕산 기슭을 바라본다는 소문에 신씨가 궁궐에서 입었던 치마를 인왕산 바위에 펼쳐 놓았다는 치마바위 전설을 낳은 곳이다. 연산군의 흥청망청도 경회루와 관련이 있다.

 “눈물 이야기는 그만 하고 밝은 이야기 좀 해주세요.”

 아빠는 범이 의견을 즉각 수용했다.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 왕권을 상징하는 국가적 행사가 열리는 곳이다.


 “세종대왕의 하루를 한번 상상해 볼까. 세종대왕은 새벽 다섯시쯤 일어나 자정께 취침했다고 해. 새벽에 일어나 왕실 어른들께 문안인사 드리고, 날이 밝으면 정사를 돌보는 거지.”

 매일 아침 조회에 참석하고 공문서를 결재하거나 상소문, 탄원서 등에 답을 내려주고 신하들을 별도로 교대로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하루 네 번씩 열리는 경연에도 빼먹지 않고 참석했다. 조선 백성들에게 가장 큰 축복이 됐던 왕이다.

 한글 창제의 산실인 집현전으로 사용됐던 수정전, 명성황후가 시해된 건청궁을 마지막으로 둘러보았다.

 “왕과 대통령을 비교하면 어떤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어?”

 “왕은 아버지 잘 만나서 되는 거고, 대통령은 국민들이 뽑는 거잖아요.”

 “맞아. 혼자 누리던 권력을 나눠 갖는 게 민주주의야. 대통령의 권력도 법 안에 있는 거야.”

<양영채 인터나루 대표 >

 

조선의 궁궐 역사

▶경복궁

조선 왕조 제일의 법궁(法宮)이다. 태조 이성계가 도읍을 한양으로 정한 후 1395년 창건됐으며 1592년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탔다. 이후 복구되지 못하다가 고종 때 흥선대원군 주도로 중건됐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주요 전각 몇 채를 제외하고 90% 이상의 전각이 헐렸다. 정부는 경복궁을 고종 때 모습의 76% 수준으로 복원할 계획이다.


 

▶창덕궁

‘왕자의 난’으로 이복동생들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태종이 피가 낭자한 경복궁을 피해 지었다고 한다. 나들이 때에 머무는 별궁으로 지었지만 임금들이 거주하면서 실질적인 법궁 역할을 했다. 임진왜란 때 불탔다가 광해군 때 재건돼 경복궁 중건 때까지 270년간 법궁으로 사용됐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창경궁

왕실 가족이 늘어나면서 창덕궁의 생활 공간도 비좁아지자 성종 때 창덕궁 이웃에 건립했다. 창덕궁과 함께 동궐로 불린다. 사도세자 이야기 등 왕실 가족 사이에 일어난 이야기도 풍부하다. 임진왜란으로 탔다가 광해군 때(1616) 재건됐다. 이후 이괄의 난과 대화재로 내전이 소실되기도 했다.


 

▶덕수궁

의주까지 피난 간 선조가 서울로 돌아와 보니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 모두 타버려 거처할 궁이 없자 월산대군 집을 행궁으로 삼아 거처한 게 덕수궁이다. 고종은 이곳에서 대한제국 황제에 올랐다.


<양영채 인터나루 대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