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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풍경이야기

진주남강의 추억

惟石정순삼 2009. 8. 14. 09:11

진주에는,
남강을 가로 지르는 다리가 시내에만 다섯 개가 있습니다.

진주 위쪽의 서장 대 옆을 흐르는
망경동과 평거동을 잇는 다리는 시민들의 성금으로 이룩된 '천수교'입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운치가 있고,
영화 '애수'에서 '비비안리'를 그리는 '로버트테일러'의
우수에 찬 모습이 회상 나는 '워털루 다리'처럼,
다리 한 가운데 관망대가 있어서

장미 꽃송이를 들고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노라면
저절로 '애수'의주인공이 됩니다.

시내를 관통하는 '진주교'다리에는
이에미(의암)바위에 서린 논개의 혼이 들어 있습니다.

왜장을 끌어안고 저 푸른 물결 위에 몸 바쳐서 몸 바쳐서.
깍지 낀 손가락이 벗겨 질까봐
손가락마다 낀 쌍가락지가 논개의 형상 되어 다리아래 달려 있습니다.

배 건네 로 불리던 도동과 칠암동을 연결하는 '진양교'는
진주의 발전을 보여주는 다리입니다.

그 '진양교'에서
예술회관에 이르는 강변로는 문화의 거리로 명명되어 있습니다.
가을이면 ,운치를 위하여 쓸지 않는 은행잎들이 발목을 덮도록 바람에 나부낍니다.
강변 야외공연장에서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덕목 높은 공연이 이루어져
문화와 예술의 진주를 실감나게 합니다.

거기,
문예회관에서 바라보이는
강 건네 진주팔경의 하나인 뒤벼리 도로의 깎아지른 암벽은
변산반도 채석강이 하나도 부럽지 않는 빼어난 절경을 자랑합니다.

'상평교'는 진주 나들목에 위치한 진주의 관문입니다.
물이 좋아 예전부터 실크와 제지의 고장으로 각광받는
진주 비단 아가씨가 문전에서 방문객을 맞아 줍니다.

동 진주로 들어오면,
새로운 혁신도시로 이어지는 '남강교'를 만날 수 있습니다.
남강교 주의의 잘 다듬어진 강 둔치에 서면
건강 달리기를 하는 인심 좋고 인상 좋은 많은 진주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 것 입니다.

봄철이면 노란 유체꽃밭에 나부끼는 나비 떼들의 현란한 색채에
여름이면 그보다 더 노란 여름국화의 늘어선 행렬에.
남강교는 눈부신 풍경에 휩싸여 있습니다.

새로운 전원도시로 각광받는
금산으로 가는 농산물 공판장 앞에는'금산교'가 있습니다.

공군 훈련소가 위치한 들녘에 늘어선 하우스에선
진주의 특산물 오이와 호박이 잘도 자라고 있습니다.

새벽이면 서울로 또 부산으로
농수산물을 싣고 차량은 무수히 금산교를 건너갑니다.

진주의 다리는 거창한 무슨, 무슨 대교라고 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소리 없이 제몫을 다하는 진주 시민들의 얼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남강은 오늘도 또 내일도, 논개의 정신을 담고 흐르고 있습니다.
한때는 인기리에 불려졌던' 진주라 천리 길을 다시 들으며
문화와 예술의 도시, 고도 천년의 도시, 진주의 다리 소개를 마칩니다,
그리고 추억의 사진 몇 장 얻어와 같이 올립니다.


서장대에서 바라본 촉석루와 뱃다리

이 뱃다리는 1912년에 일본인 사사끼마사마쓰가 가설하였는데 이는 남강에 세워진 최

초의 다리였다. 이 다리는 1925년 홍수 때 유실되고 1927년에 진주교가 가설되었다.

 

촉석루아래 민가와 선착장(1910년대)
촉석루아래 민가와 선착장(1910년대)

멀리 망경동 모퉁이가 보이고 강가에서 빨래하는 아낙의 모습에서 진주민과 남강의 생활을 엿볼 수 있다.

6.25전쟁으로 파괴 된 진주교(1950년대)
6.25전쟁으로 파괴 된 진주교(1950년대)

6.25전쟁으로 다리 상판이 파괴된 것을 임시복구한 흔적이 보인다.

남강에서의 한 때(1935년 대)
남강에서의 한 때(1935년 대)

촉석루아래 남강 백사장에서 야외학습을 하며 씨름을 즐기는 학생들

 

진주교와 다께모또구미화물자동차행렬 (1933년)
진주교와 다께모또구미화물자동차행렬 (1933년)

사진상의 진주교는 1927년 개통되었는데 도청이 진주에서 부산으로 옮겨진데 대한 무마책으로 가설되었다.

 

일제시대의 진주교

일제시대의 진주교

 

1960년대의 진주교

1960년대의 진주교

 

1983년에 준공된 새진주교

1983년에 준공된 새진주교

 

논개의 쌍가락지를 상징하여 만든 진주교 아래의 장식

논개의 쌍가락지를 상징하여 만든 진주교 아래의 장식

 

6.25 전쟁전의 촉석루와 남강(1930년대)
6.25 전쟁전의 촉석루와 남강(1930년대)

빨래하는 아낙네들의 모습과 어우러진 남강은 아직도 변함이 없는데 흐르는 맑은 물과
아낙네들의 모습을 지금은 찾을 수 없어 안타깝기만 하다.

 

진주뱃다리 가설공사(1912)
진주뱃다리 가설공사(1912)

진주뱃다리 가설공사 습과 현장을 지켜보는 진주사람들 (아래 사진은 현재의 동방호텔)

 

의암과 남강벼랑

논개의 충절이 어린 의암의 전자체 글씨는 정대륭이 썼고 벼랑에 새겨진 일대장강 천추의열은
역사와 충절의 고장 진주를 상징하는 글귀이다.

 

진주교 아래 빨래하는 아낙네들

옆에 보이는 배는 남강의 모래를 채취해 운반했던 거룻배

 

남강을 가로질러 건너는 말달구지

채찍질하는 손과 강물을 박차오르는 말의 모습에서 인생을 나타내는 작품같은 사진이다.

 

장을 보고 돌아오는 아낙네들(1950년대)
장을 보고 돌아오는 아낙네들(1950년대)

진주에서 \돗골(도동)과 큰들로 넘어가던 길목인 뒤벼리길을 장거리를 이고 가는 모습에서
힘들었던 우리네 어머니들의 모습을 알게 한다

 

남강 물을 길어가는 아낙네들(1950년대)

남강 물을 길어가는
아낙네들(1950년대)

 

새벽의 남강

물안개 서린 새벽의 남강가에서 물을 양동이에 지고 나르는 모습은 불과 30~40년전의 모습이다. 남강의 맑은 물과 어려웠던 삶을 떠올리게 한다.

 

돗골 사람들
돗골 사람들

뒤벼리에서 빨래하는 사람과 장에서 물건을 팔고 돌아오는 \;돗골\; 사람들.

 

진주교 아래에서 빨래하는 아낙들

진주교 아래에서 빨래하는 아낙들

 

아스팔트 포장전의 뒤벼리(1970년대)

아스팔트 포장전의 뒤벼리(1970년대)

아스팔트 포장 6차선으로 확장된 뒤벼리(1990년대)

아스팔트 포장 6차선으로 확장된 뒤벼리(1990년대)

 

 

뒤벼리 빨래터에서 빨래하는 사람들
뒤벼리 빨래터에서 빨래하는 사람들

절벽에 보이는 농협이라는 글자로 봐서 1960년대 후반이나 70년대의 모습이다.
(진주에는 1961년 8월 15일에 농협이 처음 들어왔다.)

 

진양교아래의 수중보
진양교아래의 수중보

이 수중보는 1998년에 설치 가동되고 있는데 이로 인해 수위 조절이 가능해져 강을 이용한 사업개발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노래; 진주라 천리 길/이미자.

진주라 천리 길을 내 어이 왔든가
촉석루에 달빛만 나무기둥을 얼싸안고

아 타향살이 심사를 위로할 줄 모르느냐

진주라 천리 길을 내 어이 왔든가
남강 가에 외로이 피리소리를 들을 적에

아, 모래알을 만지면서 옛노래를 불러본다

                        "Nice to meet you~~~! See you again!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