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낭소리
어느 날 우연(偶然)히
나는 짧은 동영상을 보게 되었는데,
자신도 모르게 가슴에 무언가가
짓누르고 있었다.
나중에 가서야 그 영상이
독립(獨立)영화 ‘워낭소리’ 예고편임을
알게 되었다.
이 영화는 경북 봉화산골에서
노인 부부가 30년 동안 키웠던 일소의
마지막 몇 년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만든 것인데,
이미 200만 명을 돌파했다고 하니
독립영화 치고는
엄청난 성공(成功)을 거둔 영화라
할 수 있다.
나는 ‘워낭소리’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내 자신과 소를 비교(比較)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할아버지의 진실함과
소의 성실함에 감탄(感歎)하면서
내 자신은 한없이 작게만
느껴졌다.
내가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아직까지 양심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지,
가슴 깊숙한 곳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왔다.
‘소(牛)만도 못한 인간아!’
부정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 마음의 소리가 오히려
내 마음을 가볍게 만들어 주기까지 했다.
나는 먼저 30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변함없는 소에 대한
할아버지의 가족같은 사랑앞에 무릎을
꿇으며 내 가슴을 치게 했다.
아니 어쩜 사람과 동물사이에
사람 같은 우정(友情)과
그러한 사랑이 가능했단 말인가.
할아버지는 소를 생각해서
자기 논에는 농약을 치지 않았고,
일할 때에도 혹시나 약에 오염된 풀을
뜯어 먹을까봐 소입에 망까지
씌워 놓았다.
언제나 할머니보다
늙은 소를 더 사랑했기에
할머니는 항상 불만을 터뜨렸지만,
여전히 할아버지는
소가 항상 최(最)우선이었다.
무뚝뚝한 노인이지만 소를 자랑할 때만은
활짝 웃으시며 말씀하시는데,
소는 그 말을 알아듣는 듯 눈물을 흘린다.
소도 역시나 주인을 생각하는 마음은
사람보다 더 속이 깊다.
무식한 사람일수록 정(情)에 약하고,
장애가 있는 사람일수록
특별한 사물에 대한 애착이 더 강하듯,
그들은 전생에 무슨 부부(夫婦)인 것처럼
서로에 대한 마음은
사람끼리의 사랑보다 더 진솔했고,
둘 사이에 어떤 고난이 와도
이겨나갈 수 있는
우직(愚直)함은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큰 능력이었다.
이제 보니
소는 할아버지 자신이었다.
아니 자신보다
더 사랑하고 소중(所重)히 여겼다.
그에게는 소가 전부였기에
소와 함께했던 시간에
기적(奇蹟)같은 일이
그리도 많이 일어났던 모양이다.
영화를 보면서 나는
자신에게 수없이 이런 질문(質問)을 했다.
나에게도 그렇게 오랜 세월동안 유지해
온 참다운 우정이 있는가.
내 인생 전부라 여기며
모든 애정(愛情)을 쏟을 수 있는
일과 사람이 있는가.
아니다.
나는 신(神)을 섬기는 일조차도
밥벌이를 위한
일이 될 때가 많았고,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오로지 내 유익과 결부시켜
자신을 위한
도구(道具)로 쓸 때가 더 많았다.
어떤 일이든 오래 인내하기 보다는
조금만 어려워도 환경(環境)을 탓하며
사람을 원망하며
진실(眞實)에서 멀어져갔던
자신이 아니었던가.
물론 나는 이 모든 원인이 사랑과
신뢰의 결핍(缺乏)에서 왔음을
잘 알고 있다.
이 시대의 종말은
자원부족이나 환경파괴라는
외적(外的)인 요소로 오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식어짐으로 스스로
해체된다는 것을
내 자신을 통해 보는 듯하다.
사랑이란 용납(容納)이다.
용납하지 못하기에 그런 우정도 없었다.
자신을 용서하고
상대를 용납하고
사건을 수용할 때 기적(奇蹟)은
지금도 그처럼 일어날 것으로 믿는다.
두 번째는 사명(使命)에 대한 생각이다.
할아버지는 귀가 어둡다.
그럼에도 소의 턱 밑에 매어놓은 방울인
‘워낭소리’는 얼른 알아 들으시고
주무시다가도 일어나신다.
할머니가 무슨 불만을 터뜨려도
묵묵부답이건만,
소의 작은 움직임에는 대꾸를 하신다.
그들은 서로 바라만 보아도
대화(對話)가 통할 것 같은 우정이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서로에 대한 의무(義務)를 충실하게
감당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소를 생각해서
사료를 주지 않고
직접 소죽을 쒀서 주기 위하여
아픈 다리를 끌면서
소꼴을 베러 나가시면서도
아픈 소를 생각하며
눈물을 훔치신다.
소 역시 주인(主人)의 마음을 아는지
제대로 서지도 못 하면서
노인이 고삐를 잡으면
산 같은 나뭇짐도 마다 않고
짊어 나른다.
노부부를 위해 마지막까지 일만하다
떠나간 소를 보고 할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갈 거면 편히 갈 것이지
늙은이들 겨울 나라고 저렇게
많이 해놓고 갔나...’
나는 소가 죽었을 때보다도
할머니의 이 독백이
오히려 내 눈물샘을 자극(刺戟)시켰다.
마지막까지도
아픈 몸으로 그렇게 많은 나무를
해 놓고 죽다니...
바로 이 대목이 무딘 내 자신이
그 소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들게 했던 것이다.
소는 이성은 없지만
코뚜레로 제어(制御) 받고,
워낭소리로 자신의 위치를 알리고
주인을 부르고 그리고
악한 짐승을 쫒게 했던 것이다.
하물며 나는 무엇인가.
이성과 영성을 소유(所有)하고 있으면서도
무엇이 나를 제어하고 있는가.
과연 소리(Logos)를 통해
자신의 위치를 알고
또 인생의 주인을 부르고 있는가.
오히려 ‘워낭’에 감사는 커녕
내 목에 매인 그것이
부담스러워,
할 수만 있으면
멀어지려는 내 자신은
분명 소만도 못하다는 생각이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세 번째는 죽음에 대한 생각이다.
갈수록 할아버지 입에는
‘아파’ ‘아파’라는 말을 달고 사신다.
할아버지나 소나 이제
너무 늙어 아플 수밖에 없었다.
어느 봄 날,
노인은 수의사에게 소가 올 해를
넘길 수 없을 거라는 사형선고를 듣게 된다.
그런데 정말로 어느 날
외양간에서 소가 일어나지 못했다.
할아버지는 가장 먼저 코뚜레를 풀어주고,
한 평생 달려있던 워낭도
재빠르게 풀어준다.
‘죽으면 좋은데 가 그래이...’
둘 사이에 맺어진
인연을 잘라내며 흐르는 할아버지의 눈물엔
오랜 세월 동거동락했던 친구가
죽은 듯 보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더해 준다.
그리고 영화는
그렇게 조용히 끝을 맺는다.
만약 그 영화가
픽션이었다면 감동은 커녕 뭔가가 빠진 듯
더 허무(虛無)해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죽는 것은
소뿐만 아니라
인생(人生)도 조용히 끝나기에,
다른 것을 덧칠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감동(感動)을 주기에 충분하다.
누구도
신의 부름 앞에선
어쩔 도리(道理)가 없다.
하지만 죽는다는 문제보다는
그 죽음 속에 진실(眞實)이 담겨 있다면
그 일은 두려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동을 줄 수 있다.
그 진실이란
죽기 전 그 사람의 삶 자체가
진실했다면 죽음 이후에
더 큰 풍성한 열매가 맺힌다는 것이다.
우리 멤버 중
어느 분의 장인 어르신이
하늘의 부름을 받을 때 마지막 유언처럼
했던 말은
어느 어르신이 그리 했듯이,
‘나는 행복하다...’
‘그동안 고마웠다...’ 두 마디였다고 한다.
마지막 순간에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성공적인 인생을
산 사람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것은 평생 진실(眞實)하게 살았다는
명백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주여,
신뢰,
가족애,
그리고 눈물이 인생에서
이리도 소중하다는 것을
이 무딘 종은
이 영화를 통해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소와 할아버지가
그리도 서로에게 동반자였듯이,
저도 당신의 소가 되어
마지막 그 순간에,
‘감사합니다!’
‘정말 행복한 삶을 살았습니다!’
이런 고백을 한 후
당신 품에 안기게 하소서.
2009년 3월 3일(삼겹살데이) 강릉에서 한억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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