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鄭)씨 정보
시 조 | 정도정(鄭道正) |
시조 유래 |
하동정씨는 본관을 같이하면서 계통이 다른 3파가 있다.
지낸 후손 정석숭(鄭碩崇)을 1세조로 10세 정인지(鄭麟趾), 12세 정여창(鄭汝昌)등으로 이어져 왔다. 등을 지낸 정응(鄭膺)을 시조로 하고 6세 정희(鄭熙), 7세 정초(鄭招)로 이어져왔다. 응양대장군(膺揚大將軍),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내고 하동백에 봉해진 정손위(鄭遜位)를 시조로 하고 있다. |
창성 유래 |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의하면 연원(淵源)을 알 수 없는 여섯 계통(系統)으로 분류(分類)하고 있으나, 현존(現存)하는 하동 정씨의 후손들은 본관(本貫)을 같이 하면서 계통(系統)을 달리하는 다음 세 계통으로 이어지고 있다. 1계통) 정도정(鄭道正)을 시조(始祖)로 하고, 그의 후손(後孫) 석숭(碩崇)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세계를 이어온 계통이다. 2계통) 정 응(鄭 應)을 시조(始祖)로 하는 계통이다. 3계통) 정손위(鄭遜位)를 시조(始祖)로 하는 계통이다. |
지 명 |
경상남도(慶尙南道) 최서부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본래 신라 다사군(多沙郡) 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 때 하동(河東)으로 고쳤고 고려 현종(顯宗) 때 남해현(南海縣)을 병합하여 하남현(河南縣)이라 하다가 후에 분리하였고 1702년(숙종 28) 섬강(蟾江)을 관문(關門)으로 삼고 진주(晋州)의 악양(嶽陽) . 화개(花開) 등이 이에 속하였다.
1703년(숙종 29) 치소를 진답면 두곡(豆谷)에 설치하고 1704년(숙종 30) 부(府)로 승격, 1730년(영조 6) 치소를 나동(螺洞)으로 옮겼으며 1895년(고종 32)에 군(郡)으로 승격하였다. 1915년 곤양군(昆陽郡)의 서면(西面)과 금양면(金陽面)을 편입하였고 1939년 하동면이 읍(邑)으로 승격되었다. |
가문 소개 |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손위(遜位)의 아들 세유(世裕)가 고려때 서북면 병마사를 거쳐 형부 상서를 지냈고, 세유의 아들 숙첨(叔瞻)은 참지정사를 거쳐 평장사를 역임했다. 봉양을 위해 사임, 뒤에 외숙(外叔)인 최우의 천거로 국자 제주가 되었다.
태종때 문과에 급제하여 좌정언(左正言)을 거쳐 판승문원사에 이르렀다. 역임하였고, 1430년(세종 12) 왕명으로 [농사직설(農事直說)]을 찬진했다. 이어 예문관 대제학이 되어 정인지와 함께 역법(曆法)을 개정했고, [회례문무악장(會禮文武樂章)] [삼강행실도발(三綱 行實圖跋)]을 편찬했다 장원 급제한 수재로 예조 및 병조좌랑 등을 역임하였고, 뒤에 세종의 총애를 받아 집현전 학사와 직제학을 지냈다. (絲綸要集)], [치평요람(治平要覽)] 등을 찬진했으며, 공조 및 이조판서, 좌참찬 등을 거치고 계유정난때 공을세워 우의정에 올랐고 정난일등공신으로 하동부원군에 봉해졌다. 편찬했으며, 김종서 등과 [고려사(高麗史)]를 찬수하고 성삼문, 신숙주 등과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에 공을 세우는 한편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지었다.
의숙공주와 혼인하여 하성부원군에 봉해졌다. 인지의 둘째 아들 숭조(崇祖)는 음보(蔭補)로 벼슬에 올라 공조 및 이조참판을 거쳐 성종때 좌리공신으로 하남군에 봉해졌다. 왕명으로 세종의 아들 영응대군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죽이고 적군을 섬멸하여 포로가 된 많은 백성들을 구출하여 당대에 이름을 떨쳤다. (八道圖)]를 제작한 실학자(實學者) 상기(尙驥)와 함께 명문의 대를 이었다 |
계 파 | |
인 구 |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하동정씨(河東鄭氏)는 남한에 총 33,864가구, 142,42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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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성 촌 |
충북 청원군 옥산면 덕촌리 |
님의 가문은 명문 거족입니다.
크나큰 자부심을 가지고 가문과 국가를 위해 많은 역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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