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5.07.18 03:00
[이승만 서거 50주기] [1]下野 후 하와이에서 보낸 마지막 5년 2개월
옷 등 넣은 가방 4개만 들고 2~3주 쉴 생각에 하와이行
교민들이 생활비 보탰지만 독립운동 시절만큼 곤궁
정부 不許로 귀국 좌절되자 급격히 건강 나빠져 입원
병실 창문 밖 태평양 보며 "저쪽이 우리 韓人들 사는 곳"
[양상훈 칼럼] 한 위대한 한국인을 무릎 꿇고 추모하며
발행일 : 2015.07.16 / 여론/독자 A30 면 (www)
그 미국인은 장의사였다. 그는 1920년에 미국서 죽은 중국인 노동자들의 유해를 중국으로 보내주고 있었다. 그런데 이승만이라는 한국인이 찾아와 그 관(棺)에 숨어 상하이로 가겠다고 했다. 한국 독립운동을 하는데 일본이 자신을 현상수배 중이라고 했다. 그 한국인은 실제 관에 들어가 밀항에 성공했다. '너의 그 애국심 때문에 네가 얼마나 고생했고, 얼마나 비난받았는지 나는 안다'는 절규는 그냥 나온 것이 아니었다.
15일 아침 서울 국립현충원 이승만 대통령 묘소를 찾았다. 나흘 뒤면 그의 50주기다. 필자 역시 이 대통령에 대해 부정적 얘기만 듣고 자랐다. 그의 생애 전체를 보고 머리를 숙이게 된 것은 쉰이 넘어서였다. 이 대통령 묘 앞에서 '만약 우리 건국 대통령이 미국과 국제정치의 변동을 알고 이용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보았다. 고개를 흔들 수밖에 없었다. 그 없이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그 없이 우리가 자유민주 진영에 서고, 그 없이 전쟁에서 나라를 지키고, 그 없이 한·미 동맹의 대전략이 가능했겠느냐는 질문에 누가 "그렇다"고 답할 수 있을까. 추모비에 적힌 지주(地主) 철폐, 교육 진흥, 제도 신설 등 지금 우리가 디디고 서 있는 바탕이 그의 손에서 나왔다. 원자력발전조차 그에 의해 첫발을 내디뎠다.
그는 무지몽매한 나라에 태어났으나 그렇게 살기를 거부했다. 열아홉에 배재학당에 들어가 나라 밖 신세계를 처음으로 접했다. 썩은 조정을 언론으로 개혁해보려다 사형선고까지 받았다. 감옥에선 낮에는 고문당하고 밤에는 영어 사전을 만들었다. 이 대통령은 독립하는 길은 미국을 통하는 수밖에 없다고 믿었다. 1905년 나이 서른에 조지워싱턴대학에 입학하고 하버드대 대학원을 거쳐 프린스턴대에서 국제정치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41년 미국에서 'JAPAN INSIDE OUT(일본의 가면을 벗긴다)'을 썼다. 그 책에서 이 대통령은 일본이 반드시 미국을 공격할 것이라고 역설했다. 책이 나온 지 넉 달 뒤 일본이 진주만을 폭격했다. 미국 정치인들은 한국인 이승만을 다시 보았다.
이 대통령은 1954년 이 책의 한국어판 서문을 이렇게 썼다. '일본인은 옛 버릇대로 밖으로는 웃고 내심으로는 악의를 품어서 교활한 외교로 세계를 속이는… 조금도 후회하거나 사죄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을뿐더러… 미국인들은 지금도 이를 알지 못하고 일인들의 아첨을 좋아하며 뇌물에 속아 일본 재무장과 재확장에 전력을 다하며… 심지어는 우리에게 일본과 친선을 권고하고 있으니….' 이 대통령은 서문을 '우리는 미국이 어찌 하든지 간에 우리 백성이 다 죽어 없어질지언정 노예는 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고 합심하여 국토를 지키면 하늘이 우리를 도울 것이다'고 맺었다. 평생 반일(反日)한 이 대통령을 친일(親日)이라고 하고, 평생 용미(用美)한 그를 친미(親美)라고 하는 것은 사실을 모르거나 알면서 매도하는 것이다.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는 "어지러운 구한말 모두 중·일·러만 볼 때 청년 이승만은 수평선 너머에서 미국을 발견했다. 그래서 그를 19세기 한국의 콜럼버스라고 부른다. 우리 수천년 역사에 오늘날 번영은 대한민국을 건국한 이 박사의 공로다. 그런데 지금 우리 국민은 이 위대한 지도자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고 했다. 거인이 이룬 공(功)은 외면하고 왜곡하며, 과(過)만 파헤치는 일들이 지금도 계속된다. 건국 대통령의 50주기를 쓸쓸히 보내며 감사할 줄 모르는 우리의 자해(自害)와 업(業)을 생각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물러난 후 겨울에 난방할 땔감도 없었다. 하와이에선 교포가 내 준 30평짜리 낡은 집에서 궁핍하게 살았다.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 친정에서 옷가지를 보내줄 때 포장한 종이 박스를 옷장으로 썼다. 교포들이 조금씩 보내준 돈으로 연명하며 고국행 여비를 모은다고 5달러 이발비를 아꼈다. 늙은 부부는 손바닥만 한 식탁에 마주 앉아 한국으로 돌아갈 날만 기다렸다. 그렇게 5년이 흘렀다.
이 대통령이 우리 음식을 그리워하자 부인이 서툰 우리말로 노래를 만들어 불러줬다고 한다. 이 대통령도 따라 불렀던 그 노래를 이동욱 작가가 전한다. '날마다 날마다 김치찌개 김칫국/날마다 날마다 콩나물국 콩나물/날마다 날마다 두부찌개 두부국/날마다 날마다 된장찌개 된장국.' 아무도 없이 적막한 그의 묘 앞에서 이 노래를 생각하니 목이 메었다.
입력 : 2015.07.20 03:00 | 수정 : 2015.07.20 07:01
[이승만 서거 50주기] [2] 마지막 나날들
그는 병실서도 늘 祖國 생각… 소원 물으니 "한국 돌아갈 여비요!"
하와이 요양병원에서 서거 때까지 3년4개월 지내
'50년 친구' 보스윅, 弔辭에서 "당신이 애국심 때문에 얼마나 고생… 잘 가시오"
5년2개월만에 돌아와 가족葬… 수십만 시민들 시청 몰려와 마지막 가는 '거인' 애도
1950년 개원한 마우나라니병원은 이승만이 있던 50년 전과 같은 자리에 같은 모습으로 있다. 3층짜리 콘크리트 건물이다. 마우나라니는 '천국의 산'이라는 뜻. 하와이의 상징인 민둥산 다이아몬드 헤드와 와이키키 해변이 멀리 내려다보인다. 내부 인테리어를 몇 차례 바꾸기는 했어도 건물은 그대로다. 이승만의 흔적을 찾기는 어려웠다. 병원 어디에도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이 마지막 삶을 보낸 곳임을 알리는 표지는 없었다. '건국 대통령 우남 이승만 박사 숭모회' 김동균(70) 부회장은 "병원 측에서도 안내 표지를 세우는 데 호의적이지만 대신 기부를 원하고 있다"면서 "병원 측과 협의해 이곳이 이승만 대통령이 마지막 날을 보내고 서거한 곳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표지를 만들 계획"이라고 했다.
병원 측은 대한민국 전직 대통령에게 병실을 무료로 혼자서 쓸 수 있도록 배려했다. 현재 병실 사용료는 연간 1인 10만달러(약 1억1400만원) 수준. 사이 챈터비 병원장은 "당시 병실료는 모르겠지만 지금 3인실인 202호를 3년 이상 사용한다면 100만달러 정도 든다"고 말했다. 프란체스카 여사에게는 병원 뒤편 직원용 숙소를 내줬다. 양아들 이인수씨는 "한 사람이 누우면 꽉 차는 작은 방이었다"고 회고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아침부터 밤까지 병실에서 남편을 돌보다 이곳에서 잠을 잤다. 병원에서 '베스트 와이프(best wife)'라고 소문이 났다. 지금은 방의 벽을 터서 널찍한 공간이 됐다. 재활용 운동 기구가 놓여 있었다.
이승만은 병실에서도 늘 한국에 돌아가고 싶어 했다고 한다. 어느 날 당시 병원장 일레인 존슨이 물었다. "이 박사님, 소원이 뭐예요?" 이승만이 대답했다. "여비요! 한국으로 돌아갈 여비요!" "아직도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세요?" "그래요!"
이승만은 6월 20일 피를 토하기 시작했다. 퀸스 병원으로 옮겨 응급 처치를 하고 닷새 만에 다시 마우나라니 병원으로 돌아왔다. 7월 4일 양자 이인수씨가 서거를 대비해 호놀룰루에 왔다. 7월 18일 많은 피를 쏟으면서 혈압이 급격히 떨어졌다. 주치의는 "오늘 밤을 넘기기 어렵다"고 했다. 침대 곁을 프란체스카와 이인수, 하와이 동지회장 최백렬 세 사람이 지켰다. 호스를 입에 문 이승만은 잠시 호흡이 거칠어지더니 이내 숨이 멎었다. "7월 19일 0시 35분, 임종하셨습니다." 간호사가 말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눈물을 흘리다가 이내 인수씨에게 말했다. "얘야, 다른 사람 앞에서는 눈물을 보이지 말자꾸나."
영결식은 한인기독교회에서 열렸다. 이승만 자신이 1918년 세운 교회다. 1938년 현재 자리로 이전하면서 광화문 모습을 본떠 만들었다. 류석춘 연세대 이승만연구원장은 "광화문 모양으로 교회를 지을 생각은 이승만 아니면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이후 같은 모양으로 개축했다. 마우나라니 병원에서 자동차로 10분 거리에 있다. 1965년 7월 21일 오후 8시 30분 열린 영결식에는 현지인과 교민 700여명이 모였다. 하와이 주요 방송 매체도 이날 오후 애도 방송을 했다. 예배당 앞 중앙에 이승만이 누운 관이 놓였고 그 위에 태극기를 덮었다. 영결식 중 고인의 얼굴을 볼 수 있도록 상반신 쪽 관 뚜껑 반을 열어 놓았다.
한 시간 영결 예배 후 영구는 히캄 공군기지로 향했다. 6·25전쟁 때 이승만과 함께 전장(戰場)을 다녔던 밴 플리트 전 주한미군 사령관이 미국 본토에서 날아와 고인의 마지막 길에 동행하겠다고 했다. 서울로 향하는 C-118 미군 특별기는 7월 21일 밤 11시 날아올랐다. 그토록 가고 싶어했던 조국으로 5년 2개월 만의 귀국이었다. 영구는 7월 23일 오후 3시 김포공항에 내렸다. 정부는 국장보다 낮은 국민장을 권했다. 이인수씨는 가족장으로 치르겠다고 했다. 이화장에서 사흘간 조문객을 맞은 후 27일 오전 10시 40분 서울 정동교회에서 장례예배를 한 후 오후 5시 45분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묻혔다. 수십만 시민들이 시청 앞 광장에 나와 '거인'의 마지막을 애도했다. 당시 언론은 '인파 수십만이 장장 30리(약 12㎞)에 이어져 영구 행렬을 따랐다'(조선일보 1965년 7월 28일)고 전했다. 이인수씨는 "국장 같은 가족장이었다"고 회고했다.
호놀룰루 한인기독교회 옆에는 이승만 동상이 서 있다. 1985년 교민들이 세운 것이다. 동상 아래에는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이라고 새겼다. 정작 고국 묘비에는 '건국'이란 말이 없다. 당초 묻힐 때는 비석조차 없었다. 프란체스카 여사가 "서양에서 묘비 없는 무덤은 죄인밖에는 없다. 이 박사가 죄인인가"라고 해서 5년 후 세운 묘비의 글이 '우남 이승만 박사의 묘'였다. 프란체스카를 합장한 후인 1998년 유족이 '건국 대통령'이라고 새긴 비석을 만들고 이를 세우려 했으나 일부 정치권이 반발해 결국 '초대 대통령'으로 바꿔 세웠다. 이인수씨는 "그 비석을 현재 비석 오른쪽 뒤편에 묻었다. 언젠가 반드시 빛을 볼 날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승만, 하와이 망명 안해… 여행 후 돌아가려는데 당시 정부가 귀국 막아"
[이승만 서거 50주기]
류석춘 연세대 이승만연구원장
류석춘〈사진〉 연세대 이승만연구원장은 "이승만은 하야 후 하와이로 갈 때 2~3주 휴가를 보낸다는 생각이었다"면서 "미국에 망명을 신청한 적도 없고 스스로 망명이라고 여기지도 않았다. 망명이란 말은 당시 언론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말했다. 이승만은 1960년 5월 29일 당시 과도 정부 수반 허정(외무장관 겸직)으로부터 여권을 발급받고 하와이로 여행을 떠났으나 1965년 7월 19일 서거할 때까지 정부의 귀국 불허로 돌아오지 못했다.
"이승만은 유학과 독립운동 기간을 포함해 모두 41년을 미국에서 살았지만 미국 시민권을 얻은 적이 없어요. 국적은 언제나 한국이었습니다." 류 원장은 "일부 독립운동가는 활동 편의를 위해 중국 여권을 만들기도 했지만, 이승만은 전 세계를 다니면서 미국 국무성이 발급한 임시 증명서를 사용했다"면서 "미국 고위층에 말이 통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했다.
하와이는 독립운동으로 나라를 세운 이승만의 사상이 숙성된 곳이다. 이승만은 1913년 2월 3일 하와이에 정착해 1939년 워싱턴으로 근거지를 옮길 때까지 25년간 활동했다. 류 원장은 "이승만은 이 기간 한인학교를 세워 교육 활동을 벌이고 '태평양 잡지'를 발행하고 논설을 쓰며 자유민주주의 사상을 숙성시켰다"면서 "하와이는 자유민주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대한민국 건국의 산실"이라고 말했다.
류 원장은 18일(현지 시각) 하와이 그리스도연합감리교회에서 열린 추모 행사에서 '이승만과 남북한의 친일 청산'을 주제로 강연했다. 그는 친일 청산에서도 이승만의 남한이 김일성의 북한보다 더 철저했다고 했다. 류 원장은 "이승만 초대 내각에는 '친일파'라고 할 만한 사람이 없었던 반면 북한에는 일본 강점기 때 도의원을 했던 초대 총리 강양욱 같은 친일 경력자가 다수 있었다"면서 "이승만의 농지 개혁은 친일 지주 세력의 기반을 무너뜨린 경제적 친일 청산이었다"고 말했다.
입력 : 2015.07.21 03:00
[이승만 서거 50주기] [3·끝] 건국의 산실
학교 짓고 독립운동… 그는 하와이서 대한민국 밑그림을 그렸다
1913년부터 본격 정착, 한인기숙학교 교장 지내고 잡지 만들어 세계정세 알려
전문가 "의무교육·농지개혁… 하와이 생활 때 노하우 담겨" "동포들 돈 횡령은 사실무근"
하와이 호놀룰루 중부 칼리히 지역은 1950년대 개발된 개인주택 단지다. 입구에 들어서자 '쿨라 콜레아(Kula Kolea)'라는 길 이름을 알리는 표지판이 보였다. 하와이 말로, 영어로는 '스쿨 코리아(한국 학교)'라는 뜻이다. 이승만이 세운 학교 '한인기독학원'이 있던 곳이다. 교사(校舍)는 사라졌지만 지명으로 흔적이 남았다. 지금은 칼리히 초등학교가 들어섰다. 이승만은 호놀룰루 시내와 태평양이 내려다보이는 이 한적한 언덕에 1923년 부지를 마련하고 5년 전 개교했던 한인기독학원을 이전했다. 1947년 폐교 때까지 300여명 졸업생을 배출했다. 학교 땅은 1950년과 1955년 두 차례에 걸쳐 나눠 팔렸다. 이승만 대통령은 하와이에서 보내온 부지 매각 대금을 인천에 새로 설립한 공과대학에 투입했다. 현재 인하대다. 대학 이름은 인천과 하와이에서 첫 글자를 땄다.
이승만에게 하와이는 자유로운 독립 국가 대한민국 건국의 산실(産室)이었다. 이승만과 하와이의 인연은 111년 전으로 올라간다. 처음 하와이 땅을 밟은 때는 1904년 11월 29일. 석 달 전 한성(서울)감옥에서 풀려나 유학을 위해 미국으로 향하던 때였다. 중간 정박지인 하와이에 하루 머무는 동안 이승만은 배에서 내려 교민 200여명을 만나 예배를 보고 연설했다.
한국인의 하와이 이민은 1902년 12월 22일 인천 내리교회 교인을 비롯한 54가구 가족이 제물포항을 떠나면서 시작됐다.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는 조건이었다. 이후 지속적으로 늘어나 1910년 인구조사에서 하와이 한인은 4533명으로 전체 인구 19만명 중 2.4%였다. 현재는 교민 4만명이 산다. 전체 인구는 140만명이다.
이승만은 서른여덟 살 때인 1913년 2월 3일 하와이에 본격 정착했다. 한인단체 국민회(당시 회장 박상하)가 초청했다. 한인이 많이 사는 하와이는 독립운동 근거지로 적합했다. 이승만은 1939년 워싱턴으로 옮길 때까지 25년간 하와이를 활동 근거지로 삼았다. 1960년 하야 후 5년을 더하면 아흔 생애의 3분의 1인 30년을 하와이에서 지냈다. '제2의 고향'인 셈이다. 1931년 독립운동 자금 마련을 위해 하와이섬(빅 아일랜드) 힐로에 세운 동지촌 숯가마터를 제외하면 대부분 이승만의 자취는 호놀룰루가 있는 오아후섬에 있다.
푸우누이 집을 마주 보고 왼쪽 길로 200m쯤 올라가면 막다른 길이 나온다. 한인기독학원의 전신인 한인여학원 자리다. 지금은 오아후 컨트리클럽으로 편입됐다. 높지 않은 담 너머로 골프장 클럽하우스가 보인다. 한인여학원은 이승만이 하와이 여러 섬을 둘러보고 교민 여자아이들이 교육을 받지 못하고 때로 본토인에게 팔려가는 일이 있는 것을 안타까워해 세운 학교다. 마우이섬 등에서 소녀들을 데려와 처음엔 여학생 기숙사를 만들었다가 여학교로 발전했다.
이승만은 하와이 도착 후 3년간 미국 감리교 선교부에서 운영하는 한인기숙학교(한인중앙학교) 교장으로 일했다. 하와이주 청사 맞은편 펀치볼 스트리트 1133번지에는 한인기숙학교 터를 설명하는 표석이 있다. 표석 동판에는 '한인 이민자들이 기증한 2000달러를 종잣돈으로 하와이 감리교 선교부가 1906년 세워 1918년까지 운영했다'는 설명을 새겼다. 지난해 교민들이 세운 것이다. 여기에 한인감리교회도 함께 있었다. '코리안 컴파운드(한국 단지)'라고 불린 이곳에서 이승만은 세계 정세를 알리고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태평양 잡지'를 냈다. 태평양 잡지(1930년 이후 '태평양 주보')는 여러 차례 발행소를 옮기다가 1930년대에는 노스 킹 스트리트 동지회관에서 발행됐다.
명문 프린스턴대학 박사인 이승만의 인기와 명성은 대단했다. 하와이 지역 사회에서 미국인 박사도 드문 때였다. 1918년 하와이대학 종합대 승격 운동이 벌어질 때 서명한 지역 유지 483명 중 이승만은 유일한 박사였다. 이승만이 세운 여학교에서 배우려는 남학생 희망자도 많았다. 이승만은 1918년 남학생을 받아들이면서 8년제 남녀공학 한인기독학원으로 개교했다. "한국인이 세운 최초의 남녀공학"(이호 목사)이다. 한인기독학원은 쿨라 콜레아 부지로 이전하기 전까지 5년간 현재 알리올라니 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다.
하와이에서 47년째 사는 이승만 연구자 이덕희씨는 한국 사회 일부의 '아니면 말고'식 이승만 공격에 대해 개탄했다. "이승만은 할 일이 있을 때마다 동포들에게 알리고 기금을 조성해 활동했어요. 교민들 돈을 가로채 사리사욕을 채웠다느니 하는 주장은 전혀 근거 없는 말입니다." 이씨는 서거 50주기를 맞아 출간한 '이승만의 하와이 30년'(북앤피플)에서 이승만이 직접 적은 회계 수첩, 하와이 등기소에서 찾은 이승만의 부동산 거래 내역 등을 발굴해 이를 꼼꼼히 분석했다. 이씨는 "이승만이 하와이에서 25년 동안 준비하며 얻은 노하우는 새로 세워진 대한민국의 12년을 이끌며 수립한 의무교육, 농지개혁 같은 정책에 반영됐다"고 말했다.
하와이는 모두 여덟 개 섬으로 이뤄져 있다. 이승만은 하와이 팔도(八島)를 조선 팔도(八道)에 비유하며 독립과 자유의 나라 대한민국을 꿈꿨다. '이 여덟 섬에 한인 아니 가 있는 곳이 없으니 가위 조선 팔도라. 장차 이 속에서 대조선을 만들어 낼 기초가 잡히기를 바랄지니 하나님이 십 년 전에 이리로 한인을 인도하신 것이 무심한 일이 아니 되기를 기약하겠도다.'('태평양 잡지' 1914년 6월)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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