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7월 17일. 예술의 전당 디자인 미술관에서 열린 20세기의 시대적 증인이라 일컫는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찰나의 거장전'을 보러 갔다. 전시장은 이미 수많은 관람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나는 우선 전시장을 꽉 채운 방대한 사진작품에 놀랐다. 그가 여러 나라를 여행하면서 어떻게 그런 명장면을 카메라 앵글에 담을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그저 경이로울 뿐이었다. 그리고 그가 만난 수많은 역사적 인물들을 사진으로 남겨 놓을 수 있었던 것은 어찌 보면 그에게는 행운일 수도 있는 것이었고, 우리에게는 귀중한 자료를 물려준 것이었다.
1년 전(2004년 8월 3일) 20세기의 대표적인 사진작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 95세를 일기로 죽었을 때 르몽드나 뉴욕 타임즈, 워싱턴 포스트를 비롯한 전 세계의 매스컴이 '시대의 눈이 사라졌다.'고 대서특필한 바 있다.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은 추모 성명을 내어 '시대의 진정한 증인인 그는 정열적으로 20세기를 찍으면서, 자신의 범 우주적인 불멸의 시각으로 우리로 하여금 인간과 문명의 변화를 영원히 기억하게 만들었다.'고 경의를 표했을 정도다.
이번에 예술의 전당에서 열리고 있는 '찰나의 거장'전은 그의 서거 1주년을 맞이하여 매그넘에서 작품이 들어오는 대규모 전시회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매우 크다고 볼 수 있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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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rty Livin'-키스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은 평생 흑백사진만 고집하며 플래시도 사용하지 않고 어떠한 연출도 거부한 말 그대로의 다큐멘터리 사진을 찍은 사진작가이다. 그는 신속하게 계속적으로 촬영할 수 있는 35mm 라이카 사진기를 가지고 불멸의 작품들을 남겼다. 브레송은 자신이 찍은 사진에 제목을 붙이지 않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다만 촬영한 장소와 연도를 기록했을 뿐이다. 사진에 대한 설명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관람자는 자신만의 눈으로 그의 사진세계를 해석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브레송의 작품을 통해 그의 사진 철학과 예술성을 확인해 보도록 하자.
생-라자르 역 후문, 파리, 1932
비가 온 뒤 물이 고인 웅덩이를 막 뛰어 건너가는 한 남자의 모습을 포착한 ‘생 라자르 역 뒤에서’(1932년)는 널리 알려진 브레송의 '결정적 순간' 미학을 보여주는 대표적 작품이다. 브레송은 널빤지 울타리의 갈라진 틈 사이로 우연히 들여다보고 있다가 한 남자가 껑충 뛸 때에 울타리 틈새로 카메라를 넣어서 촬영했다고 한다. 공중에 떠 있는 한 남자와 그의 그림자가 물에 비친 모습을 남자가 물에 빠지기 1,000분의 1초쯤 바로 전에 포착한 사진이다. 이 사진은 왼쪽과 아래쪽으로부터 1/3 가량 트리밍된 것이라고 한다.
이 사진에서 더욱 더 결정적인 것은 이 남자의 모습과 뒷배경 생 라자르역 담벼락에 붙은 서커스단 포스터의 댄서들의 동작이 일치한다는 점이다. 브레송이 포착한 결정적 순간들은 이처럼 우리가 주변에서 인식하지 못하거나, 무심코 놓쳐버리기 쉬운 일상생활의 유머와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생 라자르역 뒤에서 한 중년 남자가 광고 포스트의 무희와 흡사한 동작으로 물이 고인 거리를 뛰어 건너는 순간을 찍은 이 사진은 오늘날 캔디드 사진의 성전으로 남게 되는 '결정적 순간 The Decisive Moment' 으로 사진역사에 있어 근대 사진미학의 최고봉으로 자리잡는다.
윈저공과 심슨부인, 프랑스 1951
세기의 연인 윈저공과 심슨부인이 다정하게 앉아있는 모습이다. 대영제국의 왕위마저 미련없이 내던질 정도로 사랑은 위대한 것인가! 고상하면서도 아름다운 심슨부인을 보면 윈저공이 왕위를 내던질만도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고요한 눈길로 무엇인가를 응시하고 있는 심슨부인을 바라보는 윈저공의 표정에서 사랑이 철철 흘러넘침을 느낄 수 있다.
브레송의 사진은 무엇보다도 특히 시선을 다루는 방면에 있어서 탁월한 ‘결정적 순간’을 포착해낼 줄 알았다. 정면을 마주하고 있는, 혹은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시선이 사진 속에서 가장 강렬하게 포착된다. 또한 그는 가장 적절하게 인물을 공간에 배치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프레이밍도 대담하다. 윈저 공의 사진에서 강렬한 인상을 주는 미장센은 인물 뿐만 아니라 그의 외면까지 아우른다.
무프타르 거리, 파리, 1952
어린 소년이 양손에 포도주 병을 들고 의기양양하게 길모퉁이를 돌아서 걸어가고 있는 결정적 순간을 잡았다. 주인공의 뒤에 보이는 두 소녀의 표정이 천진난만하고 깜찍해 보인다.
브레송은 결정적인 순간들 뿐만 아니라 많은 유명한 인물들을 그의 필름에 담았다. 그의 인물에 대한 통찰력은 매우 심오하고 탁월해서 그 인물이 가진 외면 뿐만 아니라 잠재적인 면까지도 필름에 담아내는 뛰어난 능력을 가졌다.
장-폴 사르트르, 프랑스 파리, 1946.
이 사진은 세계적인 실존주의 작가 겸 철학자인 프랑스의 장-폴 사르트르가 프랑스 문학비평가, 장 폴한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장면을 찍은 것이다. 파이프를 문 채 진지한 자세로 장 폴한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시르트르의 모습에서 세계적 실존주의 철학자의 풍모가 잘 드러나고 있다. 길거리에서 대화를 나누다 생각에 잠긴 그의 모습에서 사르트르가 고뇌하는 철학자임을 느낄 수 있다.
브레송의 인물사진은 대상과 관찰자 사이에 어떠한 개입의 여지도 없는 솔직하고 자연스러운 장면을 보여준다. 대상 인물의 본질이 그대로 드러나는 듯하기 때문에 사진을 보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이들에게 친밀감을 느끼게 된다. 대화 도중 파이프를 물고 생각에 잠긴 사르트르의 모습을 포착한 이 사진은 그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장 폴 사르트르는 시몬느 드 보봐르와의 계약결혼과 1964년 노벨 문학상을 거부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저서로는 '말', '구토'(소설), '존재와 무', '변증법적 이성 비판'(철학서), '파리떼', '갇힌 방', '더러운 손', '악마와 선신', '알토나의 유폐자들'(희곡)이 있다.
시몬 드 보봐르 Simone de Beauvoir 1947
프랑스의 페미니즘 사상가이자 소설가인 시몬느 드 보봐르가 거리의 건물 앞에서 무엇인가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순간을 포착한 사진이다. 부드러운 인상이지만 그녀의 단호한 표정에서 프랑스 지성을 읽을 수 있다.
장 폴 사르트르의 연인이기도 했던 그녀는 오늘날 페미니즘의 경전으로 추앙받고 있는 '제2의 성'이란 책을 출판해서 센세이션을 일으킨다. 이 책의 주제는 '사람은 여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자로 만들어진다'는 것으로 당시 프랑스 사회에 대단한 충격을 주었다. '제2의 성'이란 남성이 '제1의 성'이라면 여성은 부차적인 성으로 취급되어 왔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문제는 여성이 본래 선천적인 약자라고 잘못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성은 약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약자로 길러지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성은 자신의 재능을 충분히 발휘할 기회를 박탈당하고 살기 때문에 남성에 비해서 약자가 될 수 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이런 점에서 보봐르는 문화적 결정론(남녀간의 차이는 문화와 교육, 그리고 환경 등의 영향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사회학 이론)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보봐르는 여성들 자신이 이런 사실을 인식하고 자유를 되찾기를 바라며, 여성도 적극적으로 사회진출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보봐르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는 알베르 카뮈조차도 '프랑스의 남성을 웃음 거리로 만들었다.'면서 분노할 정도로 많은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알베르 까뮈 Albert Camus 1947년 작품
길거리에서 담배를 문 채 무엇인가를 강렬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실존주의 철학자이자 소설가 알베르 카뮈를 찍은 사진이다. 시르트르와 함께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을 대표하는 알베르 카뮈의 깊은 사색에 잠긴 듯 한 표정과 지성적인 눈빛이 잘 나타나 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같은 느낌이다. 흐릿하고 흔들린 듯한 배경은 주인공을 더욱 뚜렷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대학에 다닐 당시 나는 실존주의 문학과 철학에 심취해 있었으므로 매우 낯익은 사진이다. 그런데 이 사진을 찍은 사람이 바로 알리 카르티에 브레송이라는 사실은 오늘 처음 알았다. 부조리와 반항의 작가,실존주의 문학의 거장 알베르 카뮈는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수필가, 극작가다. 그는 '이방인'(1942),'페스트'(1947),'전락'(1956) 등의 소설과 좌파적 현실 참여 활동으로 유명하다. 비판적인 르포와 논설로 정치적인 추방을 당하기도 했던 카뮈는 프랑스 사상계와 문학계를 대표할 만한 앙드레 말로, 앙드레 지드, 장 폴 사르트르, 샤르 등과 교유를 하면서 작품 활동을 했다. 1957년 알베르 카뮈는 44세라는 젊은 나이에 그의 전 작품을 대상으로 한 노벨 문학상을 받는다. 그러나 그는 1960년 1월 4일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실존철학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실존주의 문학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카프카가 유태인의 처참한 현실, 그 부조리한 현실 즉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일어나는 현상'을 '변신'으로 형상화했다면, 카뮈는 '이방인'으로 나타냈다. 카프카는 평생 '타인의 고독'과 싸운 작가이다. 그러나 그 '타인의 고독'은 카뮈에 의해서 더 알려지게 되고, 알베르토 자코메티에 의해서 조각작품으로 탄생하게 된다.
프랑스, 자코메티, Alberto Giacometti 1961
아서 밀러Arthur Miller (1961)
굵은 뿔테 안경을 쓴 미국의 대표적인 극작가 아서 밀러가 의자에 편안하게 앉아 있는 모습이다. 창문에 친 블라인드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이 아서 밀러의 머리와 몸에 줄무늬를 만들어 놓았다. 지극히 평범한 미국시민의 모습이다. 그러나 아서 밀러는 전설적인 여배우 마릴린 먼로와 결혼하여 세 번째 남편이 된 사람이다. 마릴린 먼로가 남자들에게 바란 것은 자신의 삶에서 평생 구할 수 없었던 인자한 부친상이었다. 아서 밀러는 마릴린에게 아버지같은 남자였으며, 그녀가 만난 남자들 중에서 가장 지적인 사람이었다.
Marilyn Monroe, John Houston & Thelma Ritter on the set of The Misfits, 1961
이 사진은 영화 '잘못 맞춘 짝(The Misfits,1961)' 세트장에서 존 휴스턴 감독의 설명을 마릴린 먼로와 델마 리터가 주의깊게 듣고있는 모습을 찍은 것이다. 마릴린 먼로의 미동도 않는 듯한 진지한 태도를 순간적으로 잘 포착했다.
이 영화를 찍기 5년 전인 1956년 마릴린 먼로는 아서 밀러와 결혼한다. 아서 밀러는 자신의 아내를 위해서 시나리오를 한 편 썼는데 이 작품이 바로 '잘못 맞춘 짝'이다. 존 휴스턴이 감독한 이 영화에는 클라크 게이블, 몽고메리 크리프트같은 쟁쟁한 배우들이 출연했다. 다른 아서 밀러의 작품들처럼 이 영화도 부자간의 갈등을 다루고 있다. 아이러니칼하게도 이 영화를 촬영하는 동안 아서 밀러와 마릴린 먼로는 이혼을 한다. 밀러는 그녀와 이혼한 뒤 사진작가와 세 번째 결혼을 하는데, 그들 사이에 태어난 딸이 현재 할리우드에서 여성감독으로 유명한 레베카 밀러다. 레베카는 영화배우인 다니엘 데이 루이스와 결혼을 했다. 이처럼 아서 밀러와 영화와의 관계는 대를 이어서 계속되고 있다.
Susan Sontag 1972
미국의 대표적인 예술평론가 중의 한 사람인 수잔 손택이 소파에 편안하게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장면이다. 비평가다운 예리하고 깊은 눈을 가진 지성적인 모습이다.
1933년에 태어난 수잔 손택은 미국 최고의 에세이 작가이자 소설가, 예술평론가로 이름을 날렸다. 그녀는 1966년 '해석은 지식인이 예술과 세계에 대해 가하는 복수다.'라는 센세이션널한 문제제기를 담은 평론집 '해석에 반대한다'를 발표한다. 이 책에서 수잔 손택은 서구 미학의 전통을 이루던 내용과 형식의 구별, 대중문화와 고급문화의 구별을 비판해서 당시의 평단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녀는 극작가, 영화감독, 연극연출가, 문화비평가, 사회운동가 등 다양한 영역을 섭렵하면서 새로운 문화의 스타일과 감수성의 도래를 알리는 데 주력했다. 이로 말미암아 그녀는 '대중문화의 퍼스트레이디', '새로운 감수성의 사제', '뉴욕 지성계의 여왕' 등과 같은 별명을 얻었다.
지난 2004년 12월 28일 미국 뉴욕의 슬론-캐터링 기념 암센터에서 백혈병으로 숨진 수전 손택(Susan Sontag)은 국제펜클럽 미국지부 회장을 지낼 당시인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서울을 방문해서 노태우 독재정권에 김남주 시인을 비롯한 구속문인들의 석방을 촉구하면서 우리나라와도 인연을 맺은 바 있다.
마르셀 뒤샹 Marcel Duchamp, 프랑스 파리, 1968
프랑스의 화가 마르셀 뒤샹이 자전거 바퀴를 오브제로 한 그의 작품 옆에 놓인 안락의자에 앉아서 시가를 피우며 휴식을 취하고 있는 모습을 찍은 사진이다.
이미 남이 만들어 놓은 탁자와 자전거 바퀴를 선택해서 `이것도 예술이다'라고 예술가가 선언할 때 그것을 예술이라 인정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뒤샹은 이렇게 답한다. 눈에 보이는 사물이나 풍경을 그림으로 옮기는 미술에서의 `재현' 행위를 전면 부정하고 예술가가 예술이라고 말하는 어떤 것이든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뒤샹의 이러한 반전통적인 사상은 미술에서 `레디메이드(ready-made)'란 용어와 개념으로 정착되어 갔다.1887년 외르 지방의 블랭빌-크레봉에서 태어나,1955년에 미국으로 귀화,1968년 뇌이이-쉬르-센느에서 사망했다. 많은 작품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미술의 형태를 변화시키기보다는 미술에 대한 개념 자체에 혁신을 가져온 뒤샹은 20세기 미술에 있어 피카소 만큼이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앙리 마티스 Henry Matisse 1944
프랑스 야수파의 거장인 앙리 마티스가 비둘기를 손에 들고 스케치를 하고 있는 모습이다. 새장 밖에서 스케치를 하고 있는 마티스를 바라보고 있는 듯 한 비둘기 세 마리가 인상적이다.
마티스의 그림들은 고유색을 부정하는 주관적인 색채와 거친 붓놀림 등이 큰 특징이다. 강렬하고 원시적인 색채를 거친 붓놀림으로 형상화함으로써 마티스는 회화적 자유와 자율성을 추구하였다. 그의 작품 세계는 기본적으로 사물 자체에 대한 관찰과 발견, 느낌과 경험에서 출발하지만 마티스는 예술이 단지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을 위한 예술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그는 사물이 갖고 있는 고유의 색채를 부정하고 혁명적인 변화를 시도하였다. 이처럼 마티스의 작품에서 색채가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색채에 관해 '내가 녹색을 칠할 때 그것은 하늘이 아니다.'라고 말했을 정도다. 마티스에게 있어서 색채는 보여지는 그대로가 아닌 자신의 경험과 감정의 표현이었고, 이는 20세기 초의 미술운동인 야수파의 전형적인 특징이기도 했다.
알프레드 스티글리츠 Alfred Stieglitz(1946)
사진 예술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로 평가받는 사진작가인 미국의 알프레드 스티글리츠가 비스듬히 등을 기대고 있는 모습을 담았다. 사진작가답게 그의 시선이 깊고 예리하다.
스티글리츠는 카메라의 기계적인 시각을 다른 장르의 예술은 보여줄 수 없는 사진만의 예술 세계로 인식하고 이것을 곧 '사진의 시각'으로 승화시킨 예술가이다. 그의 사진세계는 1917년을 기준으로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의 전기에 보여준 사진들이 사실주의에 입각해서 사회적 현실을 표현하였다면, 후기에는 단순한 사실주의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은유적 사실성을 표현하기 위해 자신의 감정이 이입된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주인공인 가브리엘 꼴레트 뒤에 그녀의 하인을 함께 배치하여 독트한 느낌을 끌어내고 있다. 하녀인 폴리니 뒷배경에 위치하는 수직구도와 작품의 전체 분위기가 꼴레트의 작품 특성만큼 심리적 미묘함으로 가득하다. 하녀는 놀란 듯한 눈을 하고 꼴레트는 도도한 표정으로 서로 다른 곳에 시선을 두고 있어서 특이한 느낌을 주는 사진이다.
사무엘 베케트, Personalities, 1964
1969년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희곡으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아일랜드 출생 프랑스 극작가인 사무엘 베케트가 그의 서재 앞에 앉아서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표정이다. 고독과 허무를 집요하게 추구한 작가답게 사무엘 베케트의 표정이 어딘가 모르게 고독해 보인다.
사무엘 베케트는 영어로 작품을 써오다가 '고도를 기다리며' 를 쓰기 3년 전에 프랑스어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그가 프랑스어로 작품을 쓰기 시작한 뒤 영어 소설에서 프랑스 연극으로 장르를 바꿨다. 그는 단조로움을 피하기 위해서, 그리고 일인칭 시점으로 된 소설을 탈피하기 위하여 프랑스어를 선택했던 것이다. 그는 그의 전 작품을 통해, 세상의 부조리와 그 속에서 의미도 없이 죽음을 기다리는 절망적 인간의 조건을 매우 인상적인 언어로 허무하게 묘사하고 있다. '고도를 기다리며'의 내용은 고목나무가 한 그루 서 있는 황량한 길가에서 비슷한 처지의 두 사람이 '고도'라는 미지의 인물이 나타나 그들을 구원해줄 것을 기다리며 나누는 대화와 일어나는 사건들을 그린 것이다.
나뭇잎이 다 떨어진 가로수 길 위에서 알레 뒤 프라도가 검은 색 망또를 걸치고 우산을 지팡이처럼 짚은 채 우두커니 서 있다. 오래된 아름드리 가로수와 중절모를 쓰고 콧수염을 기른 프라도의 모습이 묘하게 대비된다. 비에 젖은 포장도로에는 가로수와 프라도의 그림자가 실루엣처럼 어려 있어 서글픈 느낌마저 준다.
몽마르트로 가는 파첼리 추기경 Le Cardinal Pacelli, Paris 1938 몽마르트로 가는 파첼리 추기경(나중에 교황 비오 12세가 된다.)을 둘러싼 관중들이 존경심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추기경의 손에 입맞춤을 하는 사람의 표정이 매우 경건하다. 관중들의 신에 대한 외경심과 추기경에 대한 존경심이 잘 드러나 있는 사진이다. 추기경이란 어떤 존재던가! 가톨릭에서 교황 다음 가는 성직자가 아니던가! 추기경은 전 세계의 교회운영에 있어서 교황의 주요 협조자로서 교황을 보필하고 교황의 자문에 응하는 자리다. 가톨릭 교회의 성직자는 부제, 사제(신부), 주교의 세 계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교황, 추기경, 대주교, 주교는 '주교직'에 속하며, 이중 추기경은 오늘날 가톨릭 교회에 있어서 최고 권위자인 교황 다음 가는 고위 성직자 지위다 그런데 아돌프 히틀러와 파첼리 추기경에 대한 이야기는 그의 평판을 떨어뜨린다. 히틀러 치하에서 공산주의를 반대하고 독일을 연합시키기 위해 가톨릭 행동대와 산업계 지도자들을 이끈 프란츠 폰 파펜은 그 공로로 독일 부수상에 임명된다. 히틀러는 폰 파펜을 우두머리로 하는 대표단을 로마에 파견하여 나치독일과 로마 교황청 사이의 정교조약 협상을 하게 한다. 교황 비오 11세는 독일 공사에게 '독일 정부가 이제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타협할 줄 모르는 사람을 지도자로 가지게 되어 대단히 기쁘다'고 말하였으며, 1933년 7월 20일에는, 로마 교황청에서 열린 성대한 기념식에서, (얼마 안 있어 교황 비오 12세가 된 인물인) 파첼리 추기경이 정교 조약에 서명한다. 로마 교황청에서 기념식이 열리는 동안, 파첼리는 폰 파펜에게 교황의 최고 훈장인 비오의 대십자장을 수여하였다. 정교조약을 맺음으로써 로마교황청은 히틀러에게 커다란 승리를 안겨주었을 뿐만 아니라 외부세계로부터 최초의 도덕적 지원과 정통성을 베푼 셈이 되었다. 또 하나 파첼리 추기경에 대한 다른 견해가 있다. 예수회 소속의 역사학자 찰스 R. 갤러거는 예수회 잡지 「아메리카」 9월 1일자에서 교황 비오 12세에 대한 불명예스러운 혐의를 벗겨줄 하나의 사실을 발표했다. 갤러거는 이 보고서에서 교황청 국무원장으로 후에 비오 12세가 된 에우제니오 파첼리 추기경이 고위급 외교관들과의 모임에서 나치와 히틀러에 대해 그가 이교도이며 반종교적인 인물이라고 신랄한 비난을 퍼부었다고 한다. 그는 특히 파첼리 추기경이 히틀러 정권에 대해 전혀 어떠한 정치적 타협의 여지도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Edith Piaf 1946 에디트 삐아프..... 샹송의 여왕, 샹송의 대명사..... 출생부터 기구했던 그녀..... 숱한 사랑과 이별로 점철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여인..... 그래서 그런가! 흩뿌려진 듯한 밝은 햇살의 화사함과 대비되어 에디뜨 삐아프의 우수어린 표정이 어두워 보인다. 1915년 떠돌이 서커스단의 곡예사인 아버지와 삼류 가수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에디트 삐아프는 출생부터 비극의 시작이었다.그녀는 그녀의 어머니가 출산을 위해 무료 자선병원을 찾아가다가 파리의 거리 한복판에서 진통이 오는 바람에 마침 근처를 순찰하던 경찰관이 받아서 태어났다. 그후 에디트 삐아프의 어머니는 그녀를 버린 채 사라지고,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를 외할머니에게 맡긴다. 삐아프는 3살 때 감자기 시력을 잃었다가 기적적으로 시력을 회복한 적도 있다. 길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면서 구걸하던 그녀는 1933년 우연히 캬바레를 운영하는 사람의 눈에 띄어 무대에 서게 된다. '사랑의 찬가'라는 노래로 대표되는 에티트 피아프는 이 노래처럼 사랑을 위해 세상에 태어난 여인이었다. 그녀는 유럽의 헤비급 복싱 챔피언 셀든과 사귀다가 불의의 비행기 사고로 그를 잃고 만다. 52년 삐아프는 자크 필스와 결혼을 하지만 4년 뒤에 이혼의 아픔을 겪는다. 40대 후반에 들어선 그녀는 62년 21살의 청년 데오 사라보와 사랑에 빠지지만, 1년 뒤 급성 소화기 출혈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하게 된다. 죽은 연인 셀든의 생전에 그녀와 주고 받은 편지로 가사를 썼다는 '사랑의 찬가'는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있다. 체 게바라Che Guevara 1963
전세계 진보적 청년들의 영원한 우상인 혁명가 체 게바라가 포도주 잔을 앞에 놓고 티없이 맑은 웃음을 짓고 있다. 착취와 억압에 시달리는 민중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혁명전선으로 달려간 영원한 청년 체 게바라..... 스쳐 지나가는 한 줄기 바람에도 눈물을 흘릴 줄 아는 낭만주의자가 아니면 결코 혁명가가 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그는 진정한 낭만주의자였다. '억압하는 모든 것에 저항하라!'고 외치면서 자신의 신념을 위해서 목숨을 던진 사나이 체 게바라.....
체 게바라로 더욱 잘 알려진 에르네스토 게바라(1928~67)..... 그는 라틴 아메리카의 게릴라 지도자이자 혁명이론가로서1960년대 좌익급진주의자나 진보적 자식인들의 영웅이었다. 체는 아르헨티나의 중산층 가정 출신으로 1953년 부에노스 아이레스 대학에서 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오직 혁명만이 라틴 아메리카의 사회적 불평등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1954년 멕시코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던 쿠바의 혁명지도자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와 합류한다. 1950년대 후반에는 카스트로의 게릴라전쟁을 도와 마침내 쿠바의 독재자 바띠스따를 축출하는데 성공한다. 카스트로가 정권을 잡자 체는 쿠바의 산업부 장관을 맡는다. 그는 제 3세계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에 강력하게 저항하면서 카스트로 정권의 反美-親共 노선을 열렬히 옹호한다. 체는 게릴라 전쟁에 관한 두권의 책을 썼는데, 그 책에서 농민이 주동이 되는 혁명운동만이 후진국의 살길이라고 설파하고 있다. 체는 1965년 쿠바에서 볼리비아로 가서 그곳의 혁명군 지도자가 되어 볼리비아 혁명전선에 복무하게 된다. 그러나 볼리비아 공산당은 소련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볼리비아 공산당이 체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자 조직이 급속히 와해되기 시작한다. 전투 때마다 이탈자가 속출하고 기밀이 새나가 많은 조직원들이 체포되거나 피살된다. 反 게릴라전에 고도의 전략을 갖춘 미국 CIA 비밀공작원들의 지원으로 체 게바라의 부대는 숱한 기습을 받아 패전을 거듭했고, 그 역시 부상당한 채 포로가 되었다. 1967년10월9일 라틴아메리카의 혁명을 꿈꾸던 한 젊은 게릴라 전사의 파란만장한 일생은 볼리비아의 이름 없는 시골마을 라이게라에서 몇 발의 총성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비밀리에 매장된 체 게바라의 시신은 1997년에야 발견되어 그 해 10월 17일 쿠바의 산타클라라에 안장되었다.
Joe the Trumpeter and May 1935 흑인인 두 남녀를 흑백사진으로 찍으니 더 강렬한 느낌을 준다. Joe의 유난히 길다란 손가락이 그로테스크해 보인다. 그의 앞에 무표정하게 앉아 있는 여인의 사시인 듯한 시선이 독특한 인상을 준다. 전시된 작품들 중에서 흑인을 담은 유일한 사진으로 기억된다.
청조의 마지막 내시. 북경 CHINA Beijing December 1948
중국 공산당이 집권하기 직전에 촬영한 청나라 마지막 내시의 모습이다. 긴 통소매로 된 헐렁한 옷을 입고 영양실조에 걸린 듯 비쩍 마른 얼굴로 웃고 있는 내시의 모습은 몰락한 청왕조의 비극적인 운명을 상징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뒤에 보이는 높은 담장은 아마도 자금성일 것이다. 청왕조의 멸망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듯 저 천진하게 웃고 있는 늙은 내시..... 이 사진은 내가 가장 인상깊게 본 작품들 중 하나다.
내시는 중국과 우리나라에만 있었다. 내시는 외간남자들과의 접촉이 엄격하게 금지된 내전의 궁중여인들에게 어명을 전할 사람이 필요해서 만들어졌다. 초기의 내시는 성불구가 된 남자들이 맡았는데, 나중에 내시가 부족해지자 많은 돈이나 양곡을 주어서 주로 가난한 빈민층의 사람들이 지원을 하였다. 처음에는 성기를 실로 묶어 완전히 잘랐다고도 하는데, 후에는 요도는 그대로 두고 정자를 생산하는 곳만 잘랐다. 그러나 생식선은 정자뿐만 아니라 남성호르몬도 분비되는 곳으로, 생식선이 제거된 내시는 수염도 사라지고 목소리도 여성화되었다.
인도의 위대한 지도자 마하트마(위대한 영혼이라는 의미) 간디..... 전 세계인들에게 억압에 대한 비폭력 무저항주의를 가르쳐 준 스승..... 안경을 쓴 인도여성이 내어준 책에 무엇인가를 적고 있는 간디의 모습을 촬영한 것이다. 이 사진을 찍고 불과 한 시간 뒤에 간디는 암살되었다. 브레송은 세계를 놀라게 한 바로 그 역사적인 순간의 현장에 있었던 것이다.
간디는 1869년 포르반다르에서 출생한다. 그의 부모는 모두 독실한 힌두교도로서 어린 시절부터 종교적인 감화를 많이 받았다. 13세가 되던 해 같은 나이의 카스투루바이라는 소녀와 결혼하고, 1888년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 그곳에서 변호사가 되어 귀국한다. 1893년 남아프리카로 간 간디는 그곳에서 인도인에 대한 차별과 억압을 목격하고는 이에 항의하면서 인종파별 반대투쟁 단체를 조직하여 지도자로 활동한다. 그는 종교적 진리구현을 위해 실천하였으며, 아힝사(살아있는 모든 것의 불살생)를 중심으로 하는 간디주의(반영 항쟁에서 추구한 불복종, 비협력, 비폭력 무저항주의)를 주창한다. 1919년 로울랫 법에 반대하는 최초의 반영운동과, 1930년 소금전매법에 반대하는 '소금의 행진'을 선두에서 이끈다.
제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영국은 인도의 의사를 무시하고 인도인들을 전쟁터에 투입한다. 인도 국민회의는 자치정부 수립을 조건으로 영국에 협력하기로 하고, 간디는 1942년 영국에 대해 인도에서의 즉각적인 철수를 요구한다. 일본과의 전쟁이 심각해지자 영국은 간디와 국민회의파를 탄압했고 이에 항의하는 폭동이 일어나자 영국과 인도의 관계는 최악의 상태로 치다른다. 이로 인해 간디는 73세의 나이로 다시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세계대전이 끝난 뒤 국민회의파, 이슬람동맹, 영국정부간의 3자 협상이 벌어졌으나 협상 중에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사이에 유혈충돌이 일어난다. 1947년 간디의 뜻과는 달리 인도와 파키스탄이 서로 분리해서 독립하기로 결정되고, 양쪽으로부터 비난이 쏟아지는 가운데 두 종교간 갈등을 해결하고자 단식에 들어간다. 간디의 단식으로 캘커타의 폭동이 가라앉고, 1948년 1월에는 마침내 델리에서 휴전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불과 며칠 뒤 나투람 고드세라는 반(反)이슬람 힌두교 광신자에게 암살당하고 만다.
수만 명의 인도인이 애도하는 가운데 간디의 시신이 화장되고 있다. 한 위대한 사상가는 한 줌의 재로 돌아가고..... 마침 간디의 화장 현장에 있었던 브레송은 이 한 장의 사진으로 세계사의 증인이 될 수 있었다.
인도인들은 정파와 계층, 종교에 따라 간디에 대한 비판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간디는 인도의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또 서구의 수많은 종교인과 인도의 거의 모든 종파로부터 존경을 받은 사람이다. 그는 분명 인도의 위대한 정치지도자였지만 그의 생애의 밑바탕이 된 것은 종교였으며, 죽을 때까지 평등과 비폭력 무저항주의 사상을 일관되게 실천하였다.
2005년 7월 17일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찰나의 거장전' 전시개요
20세기 사진미학의 거장으로서 “결정적 순간”으로 유명한 전설적인 사진작가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의 서거 1주년을 맞이하여 2005년 5월 21일~7월17일까지 예술의전당 디자인 미술관에서 사진미학의 거장-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찰나의 거장”전을 개최합니다. 본 전시는 “결정적 순간”으로 현대 영상사진의 문을 연 카르티에-브레송의 삶과 예술이 함축된 결정적 순간을 확인할 수 있는 특별전으로서 226점의 엄선된 작품으로 구성되었으며 사진미학에 영원히 남을 결정적 순간을 펼쳐 보입니다. 이번 전시로 관람자는 오늘날 디지털 사진예술까지의 발전속에서 근대사진미학의 원천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가 왜 사진예술계의 전설적인 존재인지 그 이유를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 전시장소 : 예술의전당 디자인 미술관 ○ 전시기간 : 2005년 5월21일~ 7월 17일(56일간) ○ 입 장 료 : 성인 9천원/ 대학생 8천원/ 중,고생 6천원/ 초등, 유치원생 5천원 ○ 작품구성 :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작품 226점
○ 부대행사 : 세미나 및 이벤트 행사 ○ 주 최 : 예술의전당. 매일경제신문 · TV, 매그넘 ○ 주 관 : 유로커뮤니케이션, TCN대구방송, 마이아트 ○ 후 원 : 문화관광부, 프랑스대사관 ‘20세기의 눈’, ‘현대 사진영상의 아버지’, ‘사진미학의 교과서’, ‘사진의 톨스토이’, ‘전설적인 사진작가’, ‘근대 사진미학의 최고봉’… 그에게 붙여진 여러 수식어는 2004년 8월 3일 타계 시 국내 주요 일간지를 비롯해 르몽드, 워싱턴포스트, 뉴욕타임즈 등 세계 각국의 추모 기사가 그 명성을 대변했다. 서거 1주년에 마련된 이번 전시는 사진예술의 진면모를 보여 주기 위해 사진 작가주의를 지향하는 세계적인 사진 에이전시 매그넘에서 작품이 들어오는 대규모 특별전이다. 현대사진의 여명에서 새로운 영상사진의 문을 연 카르티에-브레송의 작품 ‘결정적 순간’을 포함한 초기 작품부터1999년 후기 작품까지 전 생애 작품들을 226점이라는 최대 작품수와 엄선된 중요 작품을 통해 그의 사진 철학과 예술성을 확인하는데 주안점을 두고자 한다. Henri Cartier-Bresson의 결정적 순간(The Decisive Moment)
그의 예술성의 근간을 이루는 요소는‘찰나’이다. 그것은 단순한 시공간의 순간(moment)이 아니라 개념적으로 지속되는 찰나(instant)인 것으로 단순히 결정적 순간을 포착하는 사진 기술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대상 자체의 본질이 가장 잘 드러나는 순간이며, 작가 의도나 피사체, 그리고 그 주변 상황이 딱 맞아떨어지고, 구도와 형태의 예술적 감각이 완벽하게 구성되는 아주 짧은 순간을 의미한다.
지금까지 발행된 사진집 가운데 가장 영향력이 있는 카르티에-브레송의 ‘결정적 순간 The Decisive Moment’ (1952년)은 그가 직접 쓴 결정적 순간의 서문을 불어판 ‘재빠른 이미지 Image a la sauvette’에 게재하지 않았으나 영어판에 실었다. 카르티에-브레송의 글이 시작되기 전에 “이 세상에 결정적 순간이 아닌 순간은 없다”라는 레츠 추기경의 명구를 인용하는데, 여기서 결정적 순간이라는 사진집 제목이 비롯되었다. 서문은 카르티에-브레송이 자신의 사진에 대한 생각과 결정적 순간의 미학에 관하여 언급한 유일한 글로서 그의 사진세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며 그 작품집은 오늘의 ‘근대 사진의 성전’, ‘사진의 고전’으로 남게 되었다. 카르티에 브레송의 결정적 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한편으로는 어떤 사실의 의미작용과 다른 한편으로는 그 사실을 설명하는 시각적으로 통찰된 형태의 엄격한 구성이 동시 발생적으로 인지되는 것이다.
카르티에-브레송은 거리에서 촬영했다. 그의 작업 전반기에 단편적인 찰나 내에서 시각적인 응집을 발견하였는데 스스로 ‘눈에 의한 고유의 통합요소’라고 불렀다. 즉각성과 복잡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강했고 서사 구조를 회피하였다. 그는 1952년 ‘결정적 순간(The Decisive Moment)’으로 불리는 사진에 있어서 새로운 유연성에 관해 서술한 바 있다. “촬영 대상의 움직임에 의해 만들어지는 순간적인 윤곽의 생성이 있다. 우리는 마치 삶의 전개에 있어서 예감적인 방법이 있듯이 움직임의 조화 속에서 작업한다. 그러나 하나의 움직임 속에는 그 동작의 과정에서 각 요소들이 균형을 이루는 한 순간이 있다. 사진 촬영은 이 순간을 포착해야만 하고 그것의 평형상태에서 고정된 때를 잡아야 한다. ” 카르티에-브레송은 현실의 세계가 생생한 빛을 띠고, 명암과 형태가 있는 장소에 꼭 자리잡는 순간을 쉽게 포착하여 제시하였으며 그의 사진 형식은 다큐멘터리 사진가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의 어록 “사진의 내용은 형식과 분리될 수가 없다. 형태에 의해서 표면, 선, 명암의 상호작용의 엄격한 조직을 의미한다”에서처럼 그의 작품의 미학적 요소 중 하나인 구도와 형태에 있어 미적 구성을 확인할 수 있는 이번 전시는 관람자로 하여금 예술적 시선에 대한 명상을 제공할 것이다.
Henri Cartier-Bresson의 철학
직관, 무의식 등 개념적으로 지속되는 시간의 찰나는 동양철학에 가깝다. 브라크로부터 받은 ‘선불교와 궁도의 예술Zen and the Art of Archery’라는 책을 계기로 일생 동안 선불교에 그의 정신적 바탕을 두고 있다. 바로 형태와 개념, 외부와 내부사이의 관계를 그의 총명함과 청명함으로 작품 세계를 실현하였던 것이다. 그는 학창시절 문학, 철학, 시에 관심을 가지고 막스, 엥겔스, 프로이드, 생 시몽, 쇼펜하우어 등을 탐독했고 마르셀 프루스트와 앙드레 말로가 다녔던 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프랑스의 지식인 이었다. 위대한 20세기 사진미학의 거장인 그에게 사진작가 리차드 아베돈은 “그는 사진의 톨스토이였다. 심오한 인본주의와 함께 그는 20세기의 증인이었다” 라고 애도했다.
카르티에-브레송은 2차 대전 중에 프랑스 영화 사진반원으로 종군 활동하다가 독일군의 포로가 되어 전쟁기간 중에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세 번의 시도 끝에 탈출하여 프랑스 레지스탕스로 활동을 하면서 강한 인간애를 체험할 수 있었다. 그는 인간애의 뜨거운 관심이 다른 무엇보다도 우선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바로 그의 철학인 휴머니즘은 작품 구석 구석에 인간과 세계에 대한 따뜻한 시각으로 가득히 스며 있다. 그는 강렬한 휴머니스트였다.
평생 라이카 카메라만 사용했으며, 연출이나 네거티브 이미지를 재구성하는 트리밍, 플래시, 광각이나 망원렌즈를 거부하고 흑백사진만 고집한 그는 사진가의 전 능력이 투입되는 찰나의 순간에서 그의 사진철학을 엿볼 수 있다
출처 : 예술의 전당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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