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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물포해전의 재구성

惟石정순삼 2013. 4. 30. 07:56


한반도 쟁탈 싸움서 日 승리. 독도 영유권 주장 시발점 돼
이희환 박사의 인천史 산책-27, 9일은 러일전쟁 발발 110주년
            ▲ '일로해전실기(日露戰爭實記)'에 수록된 제물포해전 상황도.

오는 2월9일은 러일전쟁이 발발한 날이다.


한반도 배꼽인 제물포항과 만주 관문인 여순항에서 거의 동시에 일어난 러일전쟁은 최초의 제국주의 전쟁이자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역사적 평가에서 알 수 있듯, 동양과 서양의 후발 제국주의 국가가 만주와 한반도라는 식민지 쟁탈을 다투었던 국제전이었다.

러일전쟁에서 황인종 국가인 일본이 승리하면서 만주에서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동시에 일본은 대한제국에 을사보호조약을 강요해 식민지로 만들었다.

1883년 인천을 강제로 개항시킨 지 30여년 만에 일본은 한반도를 기어코 식민지로 만들었던 것이다.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대해서는 크게 분개하면서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의 시발인 러일전쟁에 우리는 그다지 큰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일본은 러일전쟁 승전 역사를 매우 큰 역사적 자부심으로 기록하고 계승하고 있다.

특히 1883년 인천을 개항시켜 일본인에 의한 일본인의 도시로 만들었다고 생각했던 인천의 일본인들은 일찍부터 러일전쟁의 첫 승전으로 기록된 제물포해전을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하고 기념해왔다.

이를 가장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기록이 바로 인천 개항 25주년인 1908년에 출간된 두 권의 '인천개항 25주년사'와 개항 50주년을 기념해 발간한 '인천부사(仁川府史)' 기록이다.(이하 졸고, '인천이 경험한 러일전쟁', 인천문화연구 8호, 인천광역시립박물관, 2010 참조)

제물포 개항장에서 러시아 세력과 각축했던 일본인 거류민들은 러시아가 평안북도 용암포에 조차지를 얻어 포대를 축조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인천 제물포에서도 비슷한 일이 발생하지 않을까 염려했다고 한다.

이에 일찍부터 주전론을 왕성하게 개진해왔던 일본인 조직인 '인천청년회'에서는 정담 연설회와 간담회를 열어 일본정부의 즉각적인 개전을 결의했다.

그러나 막상 제물포에서 일본조계를 경비해주던 치요다(千代田)호가 2월8일 항내에서 사라지자 불안에 휩싸였다.

그러자 치요다호는 곧 일본 함대를 이끌고 제물포항에 입항했다.


                                - 당시 일본 함대의 주력함이었던 아사마호. 당시 함장 사망. 크기는 120m


니카타호(100m)와 타케시호(90m, 침몰)


나니와호(90m 함장 중상)와 아카시호(90m)


치요다호(90m) : 훗날 퇴역 시 인천 서공원에 마스트를 설치.


이 장면을 목격하고 불안에 빠져 있던 인천의 일본 거류민은 "환희에 차서 손을 흔들고 춤을 추며 좋아하며 의기양양 감격해 눈물을 흘리는 자도 있었"을 뿐만 아니라 "국기를 들고 홍등을 켰으며 해안가에서는 모닥불을 피우고 함대의 전등을 밝혀 항내가 빛났으며 거류민은 철야로 상륙한 병사를 환대했다"고 한다.

이후 일본 함대는 외항에 정박하는 한편, 수송선을 제물포에 보내 1904년 2월8일 오후 5시30분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일본육관 제12사단 제23여단인 기고에(木越)여단 3000명을 제물포에 상륙시켰다.

청일전쟁에 이어 일본군의 인천상륙작전이 무단 감행됐던 것이다.

일본해군 제4전대 사령관인 우리우 사령관은 중립항인 인천항에 정박중인 러시아함에게 9일 정오까지 항구 밖으로 떠날 것을 통첩했으며, 만약 이에 불응하면 항구 내에서 공격을 하겠다고 통고했다.


아래는 러시아 함정 바리아크호(127m, 자침)






코리예츠호(60m 자폭)



숭가리호(동청철도 여객/화물선)


이에 바랴그(Variyag)호와 코레예츠(Koreietz)호는 닻을 올리고 11시20분 끝까지 결사항전하기 위해 팔미도 해상으로 떠났다.

그러나 팔미도 해상에서 기다리고 있던 치요다호를 비롯한 일본 함정 10여 척과 대치하게 되자 전투를 벌였다.


아래는 전투상황 :








일본 4함대 사령장관 해군중장 과생외길(瓜生外吉, 우리후)과 러시아제독 바략함장 루든예프 대령


접전 40분 만에 러시아 순양함 바랴그 호는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고, 함포사격으로 만신창이가 된 두 척의 전함이 자폭함으로써 전투는 종료됐다.

2월7일 입항해 제물포항에 정박하고 있던 러시아 동청철도 소속 상선 숭가리(Sungari)호 역시 전함들의 뒤를 이어 자폭했다.

'인천부사'는 제물포에서 발간되던 '조선신보(朝鮮新報)' 호외 기사와 함께 '조선신보' 사장인 나카무라(中村忠吉)가 '일로해전실기(日露戰爭實記)'(박문관 발행)에 연재했던 증언담을 인용하면서 제물포해전을 상세하게 기록했다.

위 그림은 나카무라가 '일로전쟁실기'에 연재한 목격담에 실린 삽화로, 2월9일 오후 2시15분의 상황을 보여준다.

일본 거류민과 외국인, 그리고 일부 조선인들은 당시 육상의 해변과 산에서 무리를 지어 제물포해전을 지켜보았다.

오랜 기다림 끝에 오후 4시쯤 코레예츠호가 자폭하는 엄청난 폭발음이 거류지를 진동하자 일본 거류민들은 만세를 연호하며 환호성을 지르고 만나는 사람마다 '축하해요'라는 인사를 건넸다.


아래는 바리아크 자침 상황


아래는 카라예츠 자폭 상황



카라예츠 자폭 후


바리야크 자침 후와 우측은 자침한 화물선 숭가리호


러시아수병을 이송한 프랑스 파스칼호


러시아함 자폭 후 러시아수병들 파스칼호로 이동 중


일본 메이지천황은 1904년 2월 10일이 돼서야 대러 선전포고 칙어를 발표한다.

메이지천황은 선전포고 명분으로 "문명을 평화에서 구하는 열강과 우의를 돈독히 함으로써 동양의 치안을 영구히 유지하고, 나아가 각국의 권리와 일본의 안전을 유지하기 위함"이라고 명시했다.

일본은 한반도와 만주의 패권을 둘러싸고 도발한 러일전쟁의 현실적 목적을 감추고 이처럼 동양의 평화와 각국의 안전을 명분으로 제시했던 것이니, 오늘 아베 정권의 행보는 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다.

러일전쟁 110주년을 맞아 제물포해전의 역사를 인천사에서 새삼 깊이 되새겨봐야 할 터이다.


아래는 일본군 상륙 후 경성으로 이동하는 상황


아래는 바리아크호 인양 광경


아래는 일본해군 훈련함으로 사용 중인 바리야크호


치요다함 기념엽서와 일본천황


서공원 세창양행에서 바라본 존서턴별장과 치요다함 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