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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 있는 GI와 지게
6.25 전쟁 중 한미연합작전은 문화의 교류를 가져 왔다. 지게로 군사 물자를 옮기는 미군의 모습이 이채롭다. 지게가 한복에도 잘 어울리지만 미군 GI 군복에도 잘 어울립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입니다. 미군이 지게를 져도 하나도 어색하지 않습니다. 내가 보기엔 오히려 합바지보다 더 잘 어울립니다. 한국과 미국은 이 지구상에서 가장 잘 어울리는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테네시주 낙스빌에 있는 딸한테 가서 한달쯤 놀다가 왔는데 바로 앞집에 우체국에 다니는 그레그 라는 이가 살고 있었다. 오산 공군기지에 근무했다고 하기에 나하고 각별히 친하게 지냈습니다. 나더러 한국사람들에게 고맙다고 했습니다. 한국과 미국은 6.25를 인연으로 해서 피로 맺은 형제같은 느낌입니다.
GI와 지게
사실 한국전은 산악이 많고 길이 거의 없다시피 하기에 차량으로는
노무자위주로 구성된 일명 육군지게부대(노무사단으로 공식명칭). 차량 이동이 불가능한 전투지역에 보급품을 전달하는 임무를 띄었다. 지게는 한국만의 독특한 도구였고 미군에서는 A자처럼 생겼다고
탄약을 나르는 지게부대
포탄을 나르는 지게부대 6.25 지게부대를 아십니까? 지게부대라니 여태 들어 보지도 못한 소리! 만약 6.25 때 지게가 없었드라면 어찌 되었을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고 반문 하겠지만 지게가 없었다면 전쟁에서 불리한 상황에 몰리어 막대한 인명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또 아군은 몰살 당할 위험에 여러번 처했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70%가 산이다. 그 당시 우리 나라는 도로 등 모든 사회적 간접자산의 기반시설이 열악한 상태였다. 그때 그 운반을 맡은 것이 바로 지게였다. 무거운 탄약은 한 사람이 혼자 나르기 힘든 것도 있고 두 사람이 같이 들어야 하는 탄약도 있었다. 아무리 총이나 대포가 좋아도 탄약이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이때 미군들이 우리 나라 조상들이 고안해 낸 지게를 보고 감탄 또 감탄하였다. 두 사람이 들기도 힘든 탄약을 몇개씩 짊어 지고 올라 오는 모습을 보고 미군들은 경탄하였다. 지게 덕분에 연합군은 탄약과 무기를 쉽게 공급 받을 수 있었다. 미군들도 지게의 편리함과 우수성을 인정하여 험한 길에선 무기를 지게에 짊어지고 다녔다. 연합군의 탄약 보급에 막대한 공헌을 세운 지게부대. 새삼 우리 조상들의 슬기로움에 머리가 숙여진다.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 밖에 없는 지게. 그 지게를 외국 학자들이 한동안 연구를 하였다. 그들은 분석결과 지게의 과학성과 우수성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지게 禮讚 외국인의 눈에 비친 옛날의 지게
중류층 여인과 소년 그리고 지게꾼. KOREA Middle Class Woman Boy & Coolie 라는 타이틀이 붙어있는 1930년대 한국 소개 포스터이다.
19세기 말 프랑스에서 제작된 한국소개 엽서에 지게를 진 짐꾼들이 보인다.
미국 <내셔널 지오그래픽>지 1910년 11월호에 실린 사진 선호해 왔으며, 특히 지게는 양 어깨와 등의 힘을 조화시킨 창의적이고 과학적인 운반기구이다.(프랑스 민속학자 샤를르 바라도)
미국 <내셔널 지오그래픽>지 1910년 11월호에 실린 사진
1894년 연국화보 주간지 <일큐스트라씨용>에 실린그림
러일전쟁 중 일본의 군수물자 운반에 동원된 한국인의 모습. 지게는 전쟁 중 탄약과 물자를 공급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지게는 한국전쟁 때도 요긴하게 쓰였다. 1951년 2월, 지게꾼들이 지프를 타고 미군과 함께 전선으로 향하고 있다. 미군은 이 지게를 A Frame (A자 모양의 틀)이라고 불렀다.
지게의 종류와 부분이름
우리는 너무도 친숙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지만 100년전 조선을 찾은 서양 사람들의 눈에 지게는 가장 경이롭게 비친 운송수단이었다. 어깨 위에 걸친 장대의 양쪽에 짐을 반으로 나누어 걸고 운반하는 대부분의 나라와 달리 조선에서는 지게라는 우수한 연장을 가지고 상상할 수 없는 양의 짐을 나르고 있었다. 사람이 등에 지고 그 위에 짐을 실어 나르도록 만든 한국 특유의 운반 기구. 두 개의 가지 뻗은 장나무를, 위는 좁고 아래는 벌어지게 나란히 세운 다음, 그 사이에 세장을 가로질러 사개를 맞추고 아래위로 질빵을 걸었다. 당시 서양 사람들은 이 지게를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1인용 운송도구로 격찬하였다. 그리고 한결 같이 신문 잡지에 글이나 사진을 통해 널리 소개하였다. 자동차는 이 나라에 아직 없었다. 얼마 전부터 열린 항구에 외국인들이 가지고 들어 온 손구루마나 소형차가 간혹 보일 뿐이었다. 그 당시 인파로 붐비던 서울 거리에 덩치 큰 황소가 수레를 끌면서 짐을 나르는 광경도 볼만한 풍물 중의 하나였다 . 그보다 그들이 더욱 놀란 것은 조그마한 소년들이 지게로 쉽게 무거운 짐을 나르는 모습이었다. 유럽에서 포도 수확 때 사용하는 광주리와 비슷하게 생긴 세 발 달린 나무 지게를 사용하는데, 이 지게 뒤에는 헝겊끈을 매어 어깨에 맬 수 있게 했다. 이것은 사람이 어깨 근육을 이용해서 힘을 덜 들이고 수월하게 운반할 수 있게 한것으로 이 또한 조선인의 탁월한 발명품이다.
단지 아이들이 자기 몸보다 더 크고 무거운 짐을 운반하는 모습이 외국인이 보기에 좀 딱해 보일 뿐이었다. 조선인들이 등에 짐을 지고 쉽게 짐을 옮길 수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진작 그 짐의 무게가 그들을 놀라게 하였다. 왜냐하면 상상을 초월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조선인들의 짐을 운반하는 수천년의 경험과 기술이 숨어있었다. 최소한의 힘을 들여 최대한의 무게를 운반하는 비결은 조선인들만이 가진 지혜였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지게는 아주 이상적으로 고안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지게는 엉덩이와 등, 어깨에 무게를 골고루 나누어 분산하여 전달한다. 다리가 버틸 수 있는 한 엄청난 짐을 운반할 수 있다. 당시 이 지구상에서 조선인을 빼놓고는 이 방법을 착안한 민족이 없다. 세계에서 가장 운반력이 강한 중국인과 폴리네시아인들의 경우, 어깨 위에 걸친 막대기의 양쪽에 짐을 걸고 가운데에서 무게 중심을 잡는데 만약에 짐이 쪼갤 수 없는 짐일 때에는 양쪽에 무게가 같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무거운 것은 운반이 불가능하였다. 막대기가 길기 때문에 운반하는 데 넓은 공간이 필요하고 방향을 틀 때는 부딫칠 위험성이 있다. 그러나 지게의 경우는 간단하다. 그냥 그 자리에서 똑 바로 일어써면 그만이다.
영구 결과 115킬로를 넘지 않을 경우에는 아무 도움이 필요 없다. 130킬로 이상이면 작대기로 짚거나 옆에서 누가 거들어 줘야한다. 지게꾼이 190킬로의 짐을 지고 단거리를 운반하는 것은 보통이다. 스웨덴 출신 기자 아손 그렙스트는 '코레아 코레아' 란 책에서 지게로 대량의 짐을 장거리 운반하는 능력과 엉망진창 도로때문에 코레아가 지게꾼을 양산하게 되었다고 진술하였다. 지게라는 이름이 17세기 말, 역어유해(譯語類解)에 처음 나오는 것으로 보아 최소한 300년 이상 된 것은 분명하지만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신라시대 토우(土偶)에 지게 비슷한 것을 볼수 있는데 이것이 지게의 원조로 판명되면 지게의 역사는 의외로 길어진다. 지게와 관련해 우리가 주목할 것은 아손 그렙스트가 책끝에 언급한 내용인데 '지게의 발달'과 '도로 사정'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험한 도로는 지게의 발달을 가져왔지만 지게의 발달로 도로의 개량과 수레의 개선은 염두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건 아이러니컬한 현상이다. 1인용 운송 수단인 지게가 너무 발달해 도로 정비의 필요성이 없었고 그것은 곧 수레가 널리 쓰이지 않는 요인이 되었다고 썼는데 이해가 될듯 말듯 아리숭 합니다. 아무튼 여태 시시하게 보이던 지게가 6.25 때 대한민국을 지키는데 미군 GI와 함께 한몫 하였다고 하니 새삼 귀하게 비치고 이제 내 눈에 크게 그리고 자랑스럽게 보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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