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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본부 전시편찬관실이 1954년 손으로 직접 그린 대한해협해전 상황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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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ㆍ25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해군 장병들의 성금으로 구입한 백두산함의 모습. | ‘단쓰쓰쓰, 단단쓰단.’
1950년 6월 25일 밤, 부산 서북방 바다의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국제발광신호에 따른 길고 짧은 신호 불빛이 바다 한 구석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모르스 부호로 ‘ㆍ--- , ㆍㆍ-ㆍ’, 1950년대 당시의 통신용 포네틱 코드와 국제 해양신호 규정상 ‘지그, 폭스’(JF), 다시 말해 ‘너의 국기를 게양하라’는 뜻의 신호였다.
‘단단, 단쓰쓰쓰, 쓰쓰단(IJG)’, ‘언제 어디서 출항했느냐’는 뜻의 신호 불빛이 또다시 대한해협의 검푸른 바다를 가로지르며 파도 저 멀리로 사라져 갔다. 국제발광신호는 불빛으로 해상에서 서로 의사 소통을 할 수 있는 신호체계 중의 하나다. 해군식으로 짧은 신호인 ‘단’과 긴 신호인 ‘쓰’를 조합해 특정한 알파벳을 만들면 그것으로 기본적인 문답이 가능했다.
○ 괴선박의 출현
6월 25일 밤 국제발광신호로 국기 게양과 출항 일시와 장소를 질문한 함정은 다름 아닌 해군의 701함 백두산함이었다.
해군 백두산함은 6월 25일 낮 12시 진해통제부 사령장관 김성삼 해군대령의 명령(해본작명갑49호)에 따라 오후 3시 진해에서 출항한 터였다.
진해에서 출항한 백두산함은 부산 앞바다에 도착해 오륙도 등대 앞에서 침로를 45도로 바꿔 동북쪽으로 올라갔다.
이날 저녁 7시 30분 백두산함이 다시 변침해 38선을 향해 북쪽으로 향하던 순간 바다를 감시하던 백두산함의 견시가 정체불명의 선박을 목격했다. 검정색의 선체를 가진 괴선박은 백두산함으로부터 45도 방향, 약 7마일 떨어진 울산 앞바다에서 남쪽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괴선박을 발견한 701함은 즉시 추적을 시작했다. 이날 밤 9시 30분 백두산함은 괴선박을 계속 추적하면서 발광신호로 선박의 국적과 정체를 확인하려 했다. 하지만 괴선박에서는 어떤 응답도 없었다. 목적 항구가 어디냐는 뜻의 ‘LDO’ 신호를 보내도 괴선박은 일절 응답이 없었다. 하지만 괴선박이 일반 원양선박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백두산함은 신중하게 대처했다.
○ ‘K’ 정지하라
한 시간가량 국제발광신호를 보내던 백두산함은 마침내 ‘쓰단쓰’(K) 신호를 발신하기 시작했다. ‘정지하라’는 뜻이었다. 그럼에도 괴선박이 남하를 계속하자 백두산함은 최후 수단인 ‘쓰쓰쓰, 단쓰단단’(OL) 신호를 쏘기 시작했다. ‘정지하지 않으면 발포하겠다’는 최후의 경고였다.
밤 10시 30분 백두산함은 괴선박의 우현 100m 거리에까지 접근했다. 신호조명으로 비춰 보자 국기도 없고 배 이름조차 적혀 있지 않은 말그대로의 괴선박이었다. 중앙 갑판에는 중기관총이 보였고, 중앙부 창고처럼 보이는 구조물에 덮인 위장막 아래는 언뜻 기관포로 보이는 장치도 식별됐다.
더욱 결정적인 것은 괴선박에 타고 있는 사람들의 복장이었다. 사복 사이에 북한군 정규 해군 수병복이 보였던 것. 마침내 괴선박의 정체를 확인한 백두산함은 즉시 적선에서 멀어지며 해군본부에 상황을 타전했다.
6ㆍ25전쟁 개전 당시 해군총참모장 손원일 제독은 함정 구입을 위해 미국에 체류하고 있어 김영철 대령이 총참모장 대리 자격으로 해군을 이끌고 있었다.
○ 적선 격침 명령
26일 0시 10분 드디어 해군본부에서 포격으로 격침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백두산함은 다시 괴선박에 접근해 갔다. 26일 0시 30분 괴선박에서 약 3마일 거리에까지 접근했을 때 백두산함의 주포가 처음으로 불을 뿜었다. 백두산함으로서는 첫 번째 해상 실전이었으며, 해군 전체로 봤을 때는 첫 번째 야간 해전이었으나 주포 20발 중 5발이 적함에 명중했다.
백두산함은 더욱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기 위해 괴선박의 좌현 1마일 지점까지 접근했다. 근거리에서 주포 10발을 발사하자 10발 모두 적함에 명중했다. 이때 뒤늦게 합류한 해군 518정도 괴선박을 향해 37㎜ 함포 사격을 개시했다.
괴선박도 격렬하게 응사하면서 정체를 드러냈다. 괴선박은 구경 37㎜와 57㎜급으로 추정되는 함포를 쏘고 중기관총도 난사했다. 국제발광신호 불빛만이 소리 없이 오가다 부산~울산 사이의 앞바다는 순식간에 요란한 함포 사격 소리로 가득했다.
백두산함은 괴선박의 우현 1000m까지 과감하게 접근해 주포 10발과 중기관총을 연달아 쏘아댔다. 백두산함은 괴선박의 마스트를 파괴하고 기관실 외부 선체에도 구멍을 뚫었다. 26일 1시 10분 선수가 파손된 괴선박은 서서히 왼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괴선박은 20도 가까이 기울 때까지도 사격을 멈추지 않았다.
상호거리가 400m 정도였을 때 괴선박에서 발사한 적탄이 백두산함 조타실 좌현 하부을 뚫었다. 주포 후부에도 적탄이 명중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백두산함의 주포도 작동 불능 상태에 빠졌다. 백두산함은 침몰하면서도 계속 사격을 해대는 괴선박과 서서히 거리를 벌려 나갔다. 김종식 소위 등 해전 중 부상을 입은 장병들을 치료한 후 26일 새벽 1시 35분이 백두산함이 다시 괴선박에 접근했을 때는 이미 적선은 바닷속으로 사라진 뒤였다.
○ 대한해협 해전의 의미
괴선박의 정체는 600명에 달하는 게릴라를 후방으로 침투시킬 목적으로 부산으로 향하던 북한군 무장수송선이었다는 것이 당시 우리 군의 판단이었다. 불과 몇 시간 만에 끝난 해전이었지만 의미는 컸다.
7월달부터 미군이 참전했을 때 보급품을 수송할 수 있는 핵심 항구로서 부산의 전략적 가치는 절대적이었다. 만약 600여명에 달하는 게릴라들이 개전 당일 부산 주변에 침투했다면 아군 후방에 혼란이 상상하지도 못할 정도로 조성됐을 가능성이 높았다. 백두산함은 그런 위험을 원천봉쇄한 것이다.
김창학 갑판 3등병조는 적의 사격으로 중상을 입은 상태에서도 조타 휠을 놓지 않았다. 김춘배 갑판 3등병조는 다리에 관통상을 입고도 주포의 전화기를 끝까지 손에 쥐고 있었다. 이 두 병사의 강한 투혼은 6ㆍ25전쟁 개전 초반 우리 해군 장병들이 어떤 정신으로 무장하고 있었는지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 백두산함의 도입과정-장병 성금으로 구입한 해군 첫 전투함
이처럼 중요한 공을 세운 해군 백두산함은 도입 사연부터 평범하지 않은 군함이었다. 창군 초기 해군은 함대함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정규 전투함정이 단 한 척도 없었다.
결국 해군은 1949년 6월 해군총참모장(현재의 참모총장) 손원일 제독부터 말단 수병에 이르기까지 전 장병이 전투용 함정을 구입하기 위한 성금 모금운동을 벌였다.
그렇게 모은 성금 1만8000달러로 49년 10월 7일 미국 뉴욕 주 롱아일랜드에 있는 해양학교 실습선 ‘엔사인 화이트헤드(Ensign Whitehead)’ 호를 구입했다.
1949년 12월 24일 미국 롱아일랜드 서쪽 해안에서 화이트헤드 소위호의 수리를 마치고 백두산함이라고 명명했다. 백두산함은 50년 1월 24일 하와이의 호놀룰루 항에 도착, 3인치 주포를 장착했다. 진해 기지에 백두산함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50년 4월 10일, 전쟁이 발발하기 불과 두 달 전이었다.
백두산함, 다시 말해 엔사인 화이트헤드 호는 450톤급 내외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연안 초계정(PC-461 Class)이었다. 백두산함은 현재 대형 구축함과는 비교할 수도 없고, 오히려 고속정과 비슷한 크기의 작은 배였지만 우리 해군사에 그 어떤 군함보다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