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가 남긴 '꼬깃꼬깃 3만원'
가출이후 온갖 일 30년 일기쓰며 '문학 꿈' 키워
고등학교 입학 두 달 뒤 어느날, 나는 가출을 해 고향인 문경을 떠났다. 그후 10대에는 주로 공장생활을, 20대에는 초상화 제작, 30대와 40대 중반까지는 단순노동에 종사했다. 목공, 미장, 도배, 페인트칠, 삽질, 벌초, 외판, 광부, 리어카행상 등등 수십 가지 일을 전전하며 30년이 흘렀다.
16세에 사회생활을 시작한 나는 18세 때부터 일기를 썼다. 내 일기장은 나날의 일상과 더불어 첫 단추를 잘못 끼운 자신에 대한 자괴와 후회와 미련으로 가득 채워져 갔다. 한번에 5장, 10장씩 쓰다보니 한 달이 채 못 돼 노트 한권이 꽉 찼다. 월세 쪽방에서 자꾸만 늘어나는 일기장은 짐이 되었다. 30대를 코앞에 두고 나는 10년간 써온 일기장을 몽땅 불태우기로 했다. 그러면서 내용을 추리고 추려 대학노트 20권으로 줄였다. 그 작업이 6개월 걸렸다.
그 기간에 나는 수입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신문사 문화센터를 찾아가 시와 소설 창작을 수강하느라 군 복무 후 5년간 저축한 600만원도 모두 써버렸다. 원래는 일기장 정리를 위해 문장 공부를 시작한 것인데 강의를 듣다보니 문학에 대한 욕망이 싹텄다. 틈틈이 시간을 내 강좌를 계속 수강했다. 몰아서 합치면 4년 정도의 기간을 꼬박 채웠을 것이다. 38세 때 중앙 문예지에 투고한 나의 시 작품이 당선되었다는 통보가 날아왔다. 만기 채운 적금을 수령할 때보다 더 보람을 느꼈다. 그후 4년이 지난 2002년 겨울에 나는 첫 시집을 발간했다. 비로소 견고한 나만의 성을 하나 구축한 것처럼 가슴이 뿌듯했다.
1984년 이후 나는 파주에 산다. 1988년 6월 하순에 어머니가 다녀가셨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어머니와 나는 긴 이야기를 나눴다. 요즘 나는 그때의 긴 이야기를 토대로 소설을 쓴다. 물론 전업으로 쓸 처지는 못된다. 일류 기술자는 아니지만 용접기능공으로 일하며 생계를 해결한다. 어머니를 마장동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배웅하고 돌아온 나는 그날 밤 조용히 눈물 흘리며 미숫가루를 타먹었다. 내가 먹고 싶다고 하자 어머니가 인근 방앗간에 가서 한 양동이 구해온 것이다. 미숫가루 몇 숟가락을 떠내다가 내 손은 전기에 감전된 듯 굳어버렸다. 꼬깃꼬깃 접은 지폐 3만원이 푹 파묻혀 있었다. 그 돈은 내가 "차비로 쓰세요" 하고 어머니에게 건넸던 것이었다.
내가 조급하게 굴거나 베스트셀러 집필에 그다지 연연하지 않는 것은, 재능도 물론 미비하지만, 그보다는 내가 시인이며 소설가인 것을 이 세상에서 가장 기뻐해줄 어머니가 떠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시와 소설을 계속 쓸 수밖에 없는 이유는, 내 지갑 속 지폐 3만원과 더불어 어머니가 내 가슴에 영원히 살아 숨쉬기 때문일 것이다.
2009년이면 49세가 되는 내가 아직도 미혼이라니, 동년배와 비교하면 나는 분명 사회생활에 실패한 낙오자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과 나를 비교하지 않는다. 내 비교의 대상은 허기에 지쳐 홀쭉해진 배를 움켜쥐고 대구시내를 배회하던 그 소년이다. 내가 가장 어렵고 힘들었던 그 시기를 기준으로 삼아, 나의 자력으로 일할 수 있는 하루가 밝았다는 것을 행복이라 여기며 살아간다. 다만 시인 존 클레어의 말처럼 만약 생애에 제2판(版)이 있다면, 단 한 군데 16세의 무단가출 부분만은 교정을 하고 싶다.
신동근·시인
본지 김대중 고문, 신동근 시인에게 소감 담은 연하카드 보내
[조선일보 2008-12-31 03:24]
희망편지를 읽고
12월 26일자 신동근 시인의 편지 '어머니가 남긴 꼬깃꼬깃 3만원'을 읽은 본지 김대중 고문이 그날 아침 신 시인에게 소감을 담은 연하카드를 보냈다. 김 고문과 신 시인의 양해를 얻어 내용을 싣는다.
신 시인께
오늘 아침, 내 아내가 "오늘 희망편지 읽어봤어요?"라고 물었습니다. 일생을 신문기자로 살면서 다른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공감케 하는 글을 쓰려면 스스로는 하드보일드하게 처신해야 한다는 개똥철학(?)을 믿었던 나는 "다 그렇고 그런 기사 아닌가?"라고 대꾸했습니다. 물론 그때까지 나는 그 기사를 읽지 못했습니다.
아내가 평소 안 하던 일을 했습니다. 나에게 신 시인이 쓴 희망편지 내용을 말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3만원' 대목에 이르러 울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습니다. 우리 자신들의 일로는 운 적이 있었지만 남의 일, 남의 이야기로 운 기억이 없습니다.
"시인이라 글을 잘 썼겠지."
"글이 문제가 아니에요."
신문사에 나와서 신 시인의 글을 읽었습니다. 나는 울지는 않았습니다. 숙달(?)이 돼서 그랬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정작 내 마음을 때린 것은 '3만원'과 '어머니'보다 인생을 복기할 수 있다면 '16세 가출'은 하지 않겠다는 마지막 구절이었습니다.
젊어서 어머니를 여읜 아내는 내색은 잘 하지 않았지만 늘 '어머니'를 그리워했습니다. 이제 나이가 들면서 '어머니'가 더 생각났을 것입니다. 이미 성가해서 자식들을 가진 우리의 딸과 아들이 야속해서가 아닐 것입니다.
신 시인은 몇 줄 안 되는 차분한 글로써 일생을 글(장르는 다르지만)을 업으로 살아온 기자의 아내를 울렸습니다. 그리고 그 눈물을 보면서, 다시 글을 읽으면서 가슴이 뭉클해진 한 늙은 기자의 따뜻한 시선을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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