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금을 울리는 『어머니의 여한가』
2024년 6월 청은 구자옥 시인이 『사랑하고 그리워하고』 시집을 출간하였다.
시인은 격변기의 세월 속에 낀세대로 살아온 칠십 여 평생을 뒤돌아보며 수려한
시구로 인생을 노래하였는데, 마치 시간여행에 동행한 느낌으로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시집의 부제이기도 한 대표 시詩 『어머니의 여한가餘恨歌』를 여기에 옮겨 본다.
이 시는 질곡桎梏의 세월을 견디며 억척같이 살아온 우리들 어머니의 이야기다.
한국의 여인들이 결혼한 후 시집살이 여정에서 겪는 일생의 한(恨)이 닮겨 있다.
몇 번이나 읽고 또 읽었는데 가슴이 찡해오는 감동과 애잔한 그리움을 안겨 준다!
긴 글을 읽으면서 지루함을 덜기 위해 본인이 촬영한 사진작품 중에서
고귀한 명예, 여성의 아름다움과 강한 생명력을 상징하는 능소화와
더러운 진흙 속에서도 예쁘게 피어나는 연꽃을 삽화사진으로 꾸며 보았다.
쇠락하는 양반댁의 맏이 딸로 태어나서
반듯하고 조순하게 가풍양속 익혔는데
일도 많은 사대부 댁 맏며느리 낙인찍혀
열여덟 살 꽃다울제 숙명처럼 혼인하여
두세 살씩 터울 두고 일곱 남매 기르느라
철 지나고 해 가는 줄 모르는 채 살았구나!
봄여름에 누에치고 목화 따서 길쌈하고
콩을 갈아 두부 쑤고 메주 띄워 장 담그고
서리 오면 곶감 치고 배추 절여 김장하고
호박고지 무말랭이 넉넉하게 말려두고
어포 육포 약과 정과 과일주에 조청까지
정갈하게 갈무리해 다락 높이 간직하네!
찹쌀 쪄서 술 담그어 노릇하게 익어지면
용수 박아 제일 먼저 제주부터 봉해두고
시아버님 반주 거리 맑은 술로 떠낸 다음
청수 붓고 휘휘 저어 막걸리로 걸러내서
들일 하는 일꾼네들 새참으로 내보내고
나머지는 시루 걸고 소주 내려 묻어두네!
피난 나온 권속들이 스무 명은 족히 되고
더부살이 종년처럼 부엌살림 도맡아서
꽁보리 쌀 절구질해 연기 불며 삶아 건져
밥도 짓고 국도 끓여 두 번 세 번 차려내고
늦은 저녁 설거지를 더듬더듬 끝마치면
몸뚱이는 젖은 풀솜 천근처럼 무거웠네!
동지섣달 긴긴밤에 물레 돌려 실을 뽑아
날줄들을 갈라 늘여 베틀 위에 걸어놓고
눈물 한숨 졸음 섞어 씨줄들을 다져 넣어
한 치 두 치 늘어나서 무명 한 필 말아지면
백설같이 희어지게 잿물 내려 삶아내서
햇볕으로 바래기를 열두 번은 족히 되리!
하품 한번 마음 놓고 토해보지 못한 신세
졸고 있는 등잔불에 바늘귀를 겨우 꿰어
무거운 눈 치켜뜨고 한 땀 두 땀 꿰매다가
매정스런 바늘 끝이 손톱 밑을 파고들면
졸음일랑 혼비백산 간데없이 사라지고
손끝에선 검붉은 피 몽글몽글 솟아난다.
내 자식들 해진 옷은 대충해도 좋으련만
점잖으신 시아버님 의복 수발 어찌할꼬
탐탁잖은 솜씨라서 걱정부터 앞서는데
공들여서 마름질해 정성스레 꿰매어도
안목 높고 까다로운 시어머니 눈에 안 차
맵고 매운 시집살이 쓴맛까지 더했다네!
침침해진 눈을 들어 온 방안을 둘러보면
아랫목서 윗목까지 자식들이 하나 가득
차 내버린 이불깃을 다독다독 여며주고
막내 녀석 세워 안아 놋쇠 요강 들이대고
어르리고 달래면서 어렵사리 쉬 시키면
일할 엄두 사라지고 한숨만이 절로 난다.
학식 높고 점잖으신 시아버님 사랑방에
사시사철 끊임없는 접빈객도 힘겨운데
사대봉사 봉제사는 여남은 번 족히 되고
정월 한식 단오 추석 차례상도 만만찮네
식구들은 많다 해도 거들 사람 하나 없고
여자라곤 상전 같은 시어머니뿐이로다.
고초 당초 맵다 해도 시집살이 더 매워라
큰아들이 장가들면 이 고생을 면할 건가
무정스런 세월 가면 이 신세가 나아질까
이내 몸이 죽어져야 이 고생이 끝나려나
그러고도 남는 고생 저승까지 가려는가
어찌하여 인생길이 이다지도 고단한가?
토끼 같던 자식들은 귀여워할 새도 없이
어느 틈에 자랐는지 짝을 채워 살림 나고
산비둘기 한 쌍같이 영감하고 둘만 남아
가려운데 긁어주며 오순도순 사는 것이
지지리도 복이 없는 내 마지막 소원인데
마음고생 팔자라서 그마저도 쉽지 않네!
양지받이 배산임수 육간대청 넓은 집에
가문 날에 콩 나듯이 찾아오는 손주 녀석
어렸을 적 애비모습 그린 듯이 닮았는데
식성만은 입이 짧은 제 어미를 택했는지
곶감 대추 유과 정과 수정과도 마다하고
정 주어볼 틈도 없이 손님처럼 돌아가네!
큰일 때나 설 추석에 객지 사는 자식들이
어린 것들 앞세우고 하나둘씩 모여들면
절간 같던 집안에서 웃음꽃이 살아나고
하루 이틀 묵었다가 제집으로 돌아갈 땐
푸성귀에 마른나물 간장 된장 양념까지
있는 대로 퍼 주어도 더 못 주어 한이로다.
손톱 발톱 길 새 없이 자식들을 거둔 것이
허리 굽고 늙어지면 효도 보려 한 거드냐
속절없는 내 한평생 영화 보려 한 거드냐
꿈에라도 그런 바램 상상조차 아니 했고
고목나무 껍질 같은 두 손 모아 비는 것이
내 신세는 접어두고 자식 걱정 때문일세!
회갑 진갑 다 지나고 고희마저 눈앞이라
북망산에 묻힐 채비 늦기 전에 해두려고
때깔 좋은 세마포를 넉넉하게 끊어다가
윤달 든해 손 없는 날 대청 위에 펼쳐놓고
도포 원삼 과두 장매 상두꾼들 행전까지
두 늙은이 수의 일습 내 손으로 궤매었네.
무정한 게 세월이라 어느 틈에 칠순 팔순
눈 어둡고 귀 어두워 거동조차 불편하네
홍안이던 큰 자식은 중늙은이 되어가고
까탈스런 영감 고집 자식조차 꺼리는데
내가 먼저 죽고 나면 그 수발을 누가 들꼬
제발 덕분 비는 것은 내가 오래 사는 거라!
내 살 같은 자식들아 나 죽거든 울지마라
인생이란 허무한 것 이렁저렁 늙는 것을
낙이라곤 모르고서 한평생을 살았구나
원도 한도 난 모른다 이 세상에 미련없다
서산마루 해지듯이 새벽 별빛 바래듯이
잦아들듯 스러지듯 흔적 없이 지고 싶다.
* 작가의 변 : 지금 내 어머니는 늙고 병드셨다.
나는 평생을 어머니 곁에서 그 쓰고 맵고 고단한 시집살이를 목도했다.
여기 이 노래는 그런 어머니께서 평소에 아주 조금씩 열어 보이시던 심경을
어머니 시선으로 그려 본 것이다.
그 시대의 어머니라면 누구랄 것 없이 그런 세월을 사셨을 터···.
지금은 당신의 모든 것을 다 퍼 주시고 빈껍데기만 남은 내 어머니.
이 노래는 내 어머니의, 아니 그 시대를 살아내신 우리 모두의 어머니 노래가 아닐까?
(4·4조 운율에 맞춰 회심곡처럼 읆조리노라면 가슴속에 애잔함이 차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