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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있는 흥선대원군 초상화.
만고풍상을 이겨낸 걸인(傑人)의 풍모가 역력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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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애절벽에 꼿꼿이 선 ‘석파난’.
대원군 성품이 명쾌히 드러난 걸작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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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이자 기생이었던 초선에게 대원군이 지어준 관음암. 덕산 남연군 묘 근처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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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김씨 세도정치가 절정이던 철종 재위 시의 어느 해 이른 봄날. 서울 장안의 최고 요릿집에 전갈이 왔다. 대사헌 영초 김병학(1821∼1879)이 당대 권신들을 초청해 근사하게 대접한다는 사전 예약이었다. 요릿집 여주인은 안달이 났다. 빈객들이 오기로 한 날, 꽃 같은 기생들을 곱게 단장시켜 대기시킨 뒤 상다리가 휘도록 차려놓고 기다렸다. 귀빈들이 착좌하여 술판이 시작될 무렵 난데없이 흥선대원군이 나타나 좌중에 호언장담했다. 누구 옷을 몰래 걸쳤는지 이날 따라 매무새도 단정했다.
“그간 대감들께 신세만 지고 심려만 끼쳐 드려 송구했소이다. 오늘은 은혜도 갚을 겸 소인 흥선이가 큰 맘 먹고 마련한 주석이오니 아무 근심 마시고 양껏 즐기시지요. 무릉도원에 주지육림이 따로 있겠소이까. 허허허.”
언중유골의 일갈이었다. 합석한 고관대작들은 파락호 흥선이가 내는 술이라는 게 언짢고 자존심은 상했지만, 자고로 공술에는 원수지간도 마주 앉는다 했다. 진귀한 산해진미와 요화(妖花)들의 간드러진 교성으로 금세 희희낙락해졌지만 대원군 곁에는 어느 기생도 동석하지 않았다. 여주인이 강권해도 걸인만도 못한 적수공권의 건달 시중들다 망신당할 자 아무도 없었다. 이때 초선이가 자진해 나섰다.
철종 승하로 천하 권력 손아귀에 장악
술자리가 파해 권신들이 먼저 귀가하고 대원군도 나서려 하자 여주인이 막아섰다. 술값과 화대 시비가 붙자 대원군은 “나도 영초 대감 초대받아 온 귀하신 몸”이라고 딱 잡아뗐다. 이 모두가 조영하를 시켜 대원군이 획책한 일임을 뒤늦게 안 여주인은 대원군을 골방에 잡아 가뒀다. 여주인은 초선이에게 평생 벌어 갚으라며 노발대발하더니 울고 있는 초선이까지 냉골에 밀어 넣었다.
영웅호걸이나 걸식 빈객도 무심한 세월이야 어쩌지 못하는 법. 막장 인생 흥선대원군이 임금보다 높은 대리 섭정으로 삼천리 강토를 호령하게 될 줄 꿈엔들 예견한 자 그 누구도 없었다. 금상(철종)의 돌연 승하(1863)로 대원군의 어린 아들(고종·12세)이 보위에 오르자 천하 권력이 그의 손아귀에 장악된 것이다.
생살 여탈권을 양손에 쥔 대원군은 부패 권신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했다. 지난 60년 세월 가렴주구로 백성들을 수탈하며 피골마저 상접게 한 세도정권을 단박에 날려 버렸다. 부패 관리들을 적발해 직위고하를 막론하고 파직시켜 유배 보낸 뒤 당파정치의 온상이었던 전국 550여 개 서원 중 사액(賜額)서원 47개만 남기고 모조리 철폐시켰다. 강산을 피멍 들게 한 동인·서인·남인·북인·노론·소론·벽파·시파를 초월해 신분차별 없이 인재를 등용하고 국가재정 낭비와 당쟁 요인을 과감히 혁파했다.
백성들은 열광했다. 암울한 산하에 새날이 왔다고 남녀노소 부귀빈천 가릴 것 없이 서로 얼싸안고 춤을 췄다. 천우신조였음인지 하늘에선 슬픔과 한을 씻는 세한우(洗恨雨)가 내려 풍년이었고 기근과 역병도 물러가 바야흐로 개벽 세상이었다. 만백성의 지지와 성원을 등에 업은 대원군의 정치 개혁은 엄청난 가속이 붙었다. 육전조례(六典條例)와 대전회통(大典會通) 간행으로 엄격한 법률제도를 마련한 뒤 중앙집권적 권력기반을 확고히 다졌다. 무너졌던 강상(綱常)이 회복되고 추락했던 왕권이 복귀된 것이다.
기득권 세력의 목숨 건 저항이 거셌으나 대원군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비변사 폐지 후 의정부와 삼군부를 통한 행정권·군사권의 분리 ▲사창(社倉) 설립으로 조세운반 시 조작되는 지방관리 부정 근절 ▲토색(討索)·주구(誅求)에 혈안이 된 탐관오리 색출 ▲과감한 세제 개혁으로 양반·토호·상인 차별 없이 균등한 세금징수 ▲무명잡세와 진상제도 철폐 ▲사회 악습 개량 및 복색 간소화 ▲사치와 낭비엄금 ▲은광산 개발 허용. 이 모두가 일조일석에 이뤄낸 대원군의 치적이다.
긴 세월 공터로 남아 있는 경복궁 중건
백성 모두 살판이 났다. 시정에선 대원위대감이 ‘궁도령’과 ‘상갓집 개’ 행세하며 민초들과 살을 섞은 덕분이라고 찬탄했다. 이즈음 대원군에겐 야인 시절부터 꿈꿔 왔던 대원(大願)이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병화로 소실돼 긴 세월 공터로 남아 있는 경복궁의 중건이었다. 왕실 위엄을 되찾으며 강력한 왕권 과시를 위해서도 절실한 급선무라고 판단했다.
대원군은 주저 없이 착수했다. 부족한 재정은 ‘스스로 원해서 낸다’는 명목의 원납전(願納錢)을 거둬 충당했다. 처음엔 대원군에게 제수받은 고관대작들이 자진 납부했고, 뒤이어 새 집정세력에게 몰락당한 수구세력들도 복귀를 노리고 앞 다퉈 동참했다. 이래도 재원 고갈에 허덕이자 대원군은 한양 4대문을 가로막아 통과세를 강징했고 원납전을 내는 상놈과 백정에게도 서슴없이 벼슬길을 터줬다.
어느새 백성들 신망은 원망으로 변해 버렸다. 설상가상으로 당시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들의 각축으로 국제정세마저 대원군을 압박했다. ▲고종 3년(1866) 대동강에서의 미군함 제너럴셔먼 호 소각사건 ▲같은 해 강화 정족산성의 프랑스군 침범으로 일어난 병인양요 ▲강화 광성보에서 미해군 침략으로 야기된 신미양요(1871) ▲남연군 묘 도굴 미수사건에서 발단된 천주교인 도륙사건. 연이은 국제 현안들은 난세의 뛰어난 정략가 대원군을 사면초가로 몰아넣었다.
대원군은 일생일대 돌이킬 수 없는 또 하나의 실수를 자초하고 말았다. 며느리를 잘못 들인 것이다. 세도권세에 신물 난 대원군이 고심 끝에 간택한 고종비(妃)가 여흥 민씨(명성황후)다. 이로 인해 남연군·대원군·고종황제 3대는 여흥 민씨와 외척으로 맺어지는 운명적 인연을 갖게 된다. 문정왕후·정순왕후·순원왕후와 함께 조선조 4대 악후(惡后)로 손꼽히는 명성황후와 대원군의 만남은 청사에 유례없는 악연으로 사학계가 지목한다. 결국 시아버지·며느리 간 불구대천 앙숙 대결은 500년 종묘사직을 붕괴시키고 망국의 함정으로 빠져들게 했다.
이후 전개되는 대원군 행적과 고초는 아들 고종황제 치세 기간과 30여 년이나 겹친다. 어느새 조선반도는 중국·일본·러시아 3국 간 전쟁터로 일진일퇴와 사태 역전을 거듭했다. 이 국난의 중심에 항상 대원군과 민비가 자리했고, 급기야 대원군은 청나라 바오딩(保定)에 볼모로 잡혀가 4년이란 세월을 유폐된 채 천추의 한을 씹었다. 종국엔 국모조차 일인 자객에 난도질당하고 시신조차 훼손되는 국치를 겪어야 했다.
시아버지와 며느리 대결 망국의 함정으로
세상만사가 허망해져 탈진한 대원군 마음에 어느날 갑자기 초선이가 생각났다. 덕산 남연군 묘 앞 관음암이란 암자에 비구니가 돼 있는 그녀와 마주했다.
“초선아, 이 몹쓸 흥선이에게 남은 건 오직 너뿐이로구나.”
며칠 후 귀경한 대원군은 전신이 불덩이처럼 끓더니 곡기가 끊어졌다. 광무 2년(1898) 2월 2일 숨이 멎었다. 79세였다. 시·서화에 능하고 특히 난초를 잘 쳤던 대원군은 서세하기 전 국태공저하로 진봉된 뒤 광무 11년(1907) 대원왕(大院王)으로 추봉됐다. 시호는 헌의(獻懿)로 자는 시백(時伯), 호는 석파(石坡)였다.
<이규원 시인·‘대한민국 명당’ 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