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사이야기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50>순조대왕 인릉(下)
惟石정순삼
2010. 12. 19. 08:19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50>순조대왕 인릉(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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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임금의 실록을 필사해 분산 보관해 온 전주사고(史庫).
임진왜란의 병화를 입지 않은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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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대왕 인릉 앞에 있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표지석. 태종대왕 헌릉과 함께 있다.
| 이 세상에 천명을 거스를 자 그 누구이겠는가.
순조대왕이 조선 임금으로 재위하던 34년(1801~1834) 동안에는 하늘과 땅에서 해괴한 변고가 수시로 일어났다. 멀쩡한 대낮에 천둥·번개가 몰아치고 청천하늘에 흰 무지개가 떴다. 대지를 집어삼킬 듯한 적란운이 서녘 하늘에 타올라 누구나 불길한 조짐을 예견하기도 했다. 이럴 때마다 백성들은 전율하며 공포에 떨었다.
순조는 곤룡포를 입은 채 정전으로 옮겨 양슬착지(兩膝着地)한 뒤 모두가 왕의 부덕임을 탓했다. 수라상의 반찬 수를 줄이고 경범죄인들을 방면하는가 하면 지방 하급관리들을 한 직급씩 특진시켰다. 신분제도에 묶여 평민조차 되지 못한 궁액노비가 1만여 명이 넘었는데, 그들의 호적문서를 네거리에서 불살라 철천지한을 해원시켜 주기도 했다. 그래도 강토의 재앙은 끊이지 않았다.
부왕 정조 때 비롯된 신해박해(1791) 이후 금조(今朝)에 들어서만도 신유(1801)·을해(1815)·정해(1827)년의 3대 박해 당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천주교인 수가 이미 수천 명을 넘어섰다. 서부지방에서는 전염병이 창궐해(1821) 10만여 명의 백성이 떼죽음을 당했다. 이래도 조정에서는 핵심 요직을 독식하기 위한 권력싸움뿐이었다.
과거시험까지 조작… 마침내 민초 봉기
이번에는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문중 간의 이전투구였다. 안동 김씨의 처가 폭정을 제압하고자 순조는 풍양 조씨 며느리(세자빈)를 간택했는데 또 다른 정면 대결로 비화된 것이다. 전정(田政)·군정(軍政)·환정(還政)의 삼정이 문란해지고 과거시험까지 조작되자 시정에서는 흉흉한 소문마저 난무했다.
마침내 민초들이 봉기했다. 순조 11년(1811) 평안도 용강 사람인 홍경래가 난을 일으켜 평안북도 10개 군을 순식간에 장악해 버린 것이다. ‘평서대원수’를 자칭한 홍경래는 ▲서북민 차별 철폐 ▲안동 김씨 세도정권 타파 ▲신인 정도령의 참 임금 옹립의 기치를 내걸고 관군과 맞섰다. 몰락한 양반·유랑지식인·서민지주층·빈농·광산노동자·유민들이 가세했다. 결국 관군과의 치열한 교전 끝에 난은 평정됐으나 5개월에 걸친 내전으로 민심은 등을 돌렸다. 홍경래 등 주모자가 효수되고 농민군 1917명이 즉결 참수형에 처해졌다.
민란은 전국으로 번졌다. 제주의 토호 양제해 반란(1813), 용인 이응길의 모반(1815), 유칠재·홍찬모의 흉서사건(1817), 액예(掖隸)·원예(院隸)의 괘서작당(1819)으로 이어지며 왕정을 옥죄었다. 한양 거리에는 거지와 도적 떼가 들끓어 치안은 마비됐다. 순조는 처가 권신들의 세도정치에 절치부심했다.
오가작통법, 봉건군주제 도전 불러
민생이 이 지경인데도 오히려 세도 권력가들은 안하무인이었다. 모든 민가의 다섯 가구를 하나로 묶어 정보를 염탐하고 감시하는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으로 백성들을 치죄했다. 5가구 중 천주교인이나 반역자가 있으면 밀고케 해 내통자는 살려 주고 4가구는 멸문시켰다. 끔찍한 오가작통법으로 야기된 민초들 간 상호 불신이 피를 불렀고 급기야는 봉건군주제에 대한 도전으로 폭발했다.
순조는 당황했다. 순조 27년(1827) 백성들로부터 신망받는 효명세자(추존 문조익황제)의 대리청정을 민심수습책으로 내놓았다. 어릴 적부터 비범했던 세자는 왕권을 농락하는 외척 세도정치로 이미 조선왕조가 망조에 들었다고 판단했다. 19세의 세자는 사소한 대립으로 극형에 처하는 형옥을 신중히 하고 변방의 어진 인재를 고루 등용해 상처난 민심을 위무했다. 순조의 용안에 모처럼 웃음꽃이 만발했다.
세자 처가인 풍양 조씨는 물론 남양 홍씨, 나주 박씨, 여흥 민씨, 동래 정씨 등도 출사하며 조정에 다시 탕평 기운이 감도는 듯싶었다. 그러나 안동 김씨 측에서는 용납 못할 일이었다. 특히 모후 순원왕후 김씨는 아들에 대한 배신감으로 팽배해 있었다.
당시 세자에게는 세손(헌종대왕)이 성장하고 있어 세자만 제거되면 왕후의 수렴청정으로 권력은 다시 안동 김씨 수중으로 되돌아오는 것이었다.
선정을 펴던 세자가 대리청정 4년 만에 갑자기 죽었다. 22세의 건강한 청년이었다. 한 집에 오래 살다 보면 발자국 소리만 듣고도 누구인지를 식별할 줄 아는 법이다. 순조는 부모 인연과 권력 유지라는 화두 속에서 식음을 전폐했다. 행장에는 ‘모든 것을 알아챈 대왕은 마음의 생기가 삭아 낙을 잃었고 중병을 얻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뜻 있는 선비들 벼슬 던지고 세상 등져
이후 조선사회는 극도로 피폐해졌다. 과거 급제로 출세하는 것보다 재물로 관직을 사는 매관매직이 훨씬 빨랐다. 천민이 돈을 벌어 벼슬길에 오르다 보니 기존의 사회질서가 급속히 붕괴됐다. 갓끈조차 맬 줄 모르는 급조 양반이 속출하고 어제까지의 ‘종 놈’이 몰락한 상전한테 주인행세하려 들었다.
뜻 있는 선비들은 벼슬길을 내던지고 세상과 등졌다. 방랑시인 김삿갓(김병연·1807~1863)이 죽장망혜에 걸망 하나 짊어지고 전국 산하를 주유하며 세도인심을 조롱하던 시기도 이때다. 이 당시 강산을 유리걸식하며 세상을 개탄한 건 김삿갓뿐만 아니다. 수많은 몰락 선비들이 삿갓으로 햇빛을 가리고 동가식서가숙했다. 그들은 가진 자와 권세가를 이렇게 야유했다.
“천탈관이득일점(天脫冠而得一點)에 내실장이횡일대(乃失杖而橫一帶)라. 하늘 天자가 갓을 벗고 점 하나를 얻으니 개 犬(견)자요, 이어 乃자가 지팡이를 잃고 옆으로 띠를 둘렀으니 아들 子(자)자로다. 파자(破字)한 두 자를 합치면 犬子, 즉 ‘개자식’이다.
자식들마저 앞세워 기댈곳 조차 없어
순조는 가족사까지도 불행했다. 순원왕후 김씨에게서 1남 3녀를 득출했으나 세자는 대리청정하다 젊은 나이에 서세하고 명온·복온·덕온공주는 하가 후 소생 없이 일찍 죽었다. 후궁 숙의박씨가 낳은 영온옹주도 출가 전 병사하고 말았다. 민심은 이반된 채 왕권은 온데간데없고 자식들마저 앞세운 임금에겐 기댈 곳이 없었다. 밥맛이 소태처럼 썼고 눈뜨기조차 힘겨웠다.
순조는 견제 세력이 전무한 안동 김씨 독주 세도보다 정쟁으로 용호상박하던 당쟁치도가 차라리 낫다고 생각했다. 왕명으로도 어쩌지 못하는 치세일 바에야 뭐하러 용상에 앉아 있는지 의구심으로 가득 찼다. 서슬 퍼런 위엄으로 조정 신료들을 호령하며 치리(治理)하던 증조모 정순왕후가 그리워지기도 했다. 돌이켜 보니 범 없는 산골에 토끼가 선생 노릇하는 격이었다.
왕으로서 자신이 한 치적이라곤 일본에 통신사를 보낸 것과 양현전심록·서운관지·동문휘고 등 몇 권의 서적 발간 외엔 없었다. 순조의 가슴속에 뜨거운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내 이 자들을 그냥 두지 않을 것이로다.”
임금의 옥체가 갑자기 편안해졌다. 국상이 난 것이다. 1834년 11월 13일 재위 34년 4개월 13일 만인 보령 45세였다. 이 같은 사실들은 총36책의 순조실록에 기록돼 전주 경기전 내의 전주사고(史庫)에 보관돼 왔다. 이 사고는 임진왜란에도 병화를 입지 않은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이규원 시인·‘대한민국 명당’ 저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