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예종대왕 능 뒤에서 바라본 창릉의 풍수적 물형. 간좌곤향의 서남향으로 계비 안순왕후 능은 왼쪽에 있다. |
 |
예종과 안순왕후의 창릉 비각. 원비 장순왕후(한명회 셋째 딸) 능은 별도로 안장돼 있다. | 사람이 한평생을 살아 가면서 돈을 잃는 것은 많은 것을 잃는 것이고, 명예를 잃는 것은 거의 다 잃는 것이며, 건강을 잃는다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옛 현철(賢哲)들은 천하를 얻고도 몸 하나 못 챙기면 대사를 그르치고 만다고 경책(警責)했다. 조선 제8대 임금 예종(1450∼1469)이 그러했다.
무력으로 정권을 잡은 세조는 등극하자마자 큰아들 장(暲)을 의경세자로 책봉(1457)하고 대통을 이으려 했으나 3개월 뒤 원인 모를 병으로 세상을 떠나니 세자 나이 20세였다. 당황한 세조는 곧바로 둘째 왕자 해양대군 황(晄)을 세자 자리에 앉히고 차기 왕 수업을 시켰다. 그때 해양대군은 형인 의경세자보다 12세 연하인 8세였다.
세조는 만사가 불안했다. 사람이 위기에 처할수록 가장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건 최측근이다. 세조는 심복 중의 심복인 한명회(1415∼1487)의 셋째 딸을 세자빈으로 책봉해 조정의 권력구도를 견고히 했다. 이가 바로 예종과의 사이에서 인성대군을 낳고 17세로 승하한 장순(章順)왕후다. 장순왕후의 인생역정은 공릉 편에서 상세히 다루기로 한다.
세조는 자신의 죽음을 직감했다. 임금이 되고 14년째 되던 1468년 9월 7일 측근들을 불러 놓고 세자에게 양위를 선포했다. 대신들은 결사반대했지만 세조는 이튿날 세상을 떠났다. 정희왕후(세조 왕비)가 그날 즉시 19세의 세자를 등극시켜 왕위 대통을 잇게 하니 예종 대왕이다.
○ 정희왕후 조선 최초 수렴청정
왕조시대에도 성년 나이는 20세였다. 20세 미만의 세자가 대위(大位)에 오르면 왕실 최고 어른이 섭정하게 되는데 이 당시 왕실의 최고 수장은 명실 공히 예종의 모후인 정희왕후였다. 이런 연유로 조선 최초의 수렴청정이 비롯되는 것이다. 용상(龍床·임금의 평상의자) 뒤에 발을 쳐놓고 어린 임금 대신 정무를 처결하는 수렴청정(垂簾聽政)은 많은 폐단과 함께 이후로도 여러 차례 계속됐다.
조선 초기 ‘철의 여인’으로 회자되는 정희왕후(1418∼1483)의 정치권 등장은 후일의 왕권구도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정정공 윤번의 딸인 그녀는 파평 윤씨로 고려 예종 때 나라를 구한 윤관 장군의 후손이다. 계유정난 당시 사전 정보 누설로 세조가 거사를 망설이자 손수 갑옷을 입혀 주며 용병을 결행케 한 결단력이 강한 여장부였다.
조정의 권신(權臣)들을 완전히 장악한 어머니의 후광으로 임금이 된 예종은 비록 어리긴 했지만 탄탄대로였다.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만사형통이었기 때문이다. 먼저 세상을 떠난 부인(장순왕후)의 아버지가 영의정 한명회여서 마음이 놓였고, 계비로 맞이한 안순왕후 역시 우의정 한백륜의 딸이어서 걱정할 게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늘은 모든 것을 한 사람에게 내주지 않았다. 태어날 적부터 약질이었던 예종은 성장하면서 잔병치레가 많았다. 먼저 죽은 형(의경세자)처럼 큰어머니(현덕왕후·단종 어머니)와 사촌 형(단종)이 자주 꿈에 나타나 힐끗 쳐다볼 때마다 등골이 오싹하고 소름이 끼쳤다. 때로는 가위에 눌려 소리를 지르고 온몸이 구름 위를 둥둥 떠다니는 것만 같았다.
예종은 어릴 적부터 효성이 지극했다. 부왕 세조가 승하하면서 지나치게 슬퍼한 나머지 수라를 자주 거르고 병상에 눕는 날이 빈번해졌다. 예감이 불길해진 정희왕후가 임금을 친히 보살피고 전의를 시켜 극진히 치료했지만 이미 드리워진 죽음의 그림자는 거둘 수 없었다. 딸인 의숙공주도 하성부원군 정현조에게 시집갔으나 일찍 죽고 말았다. 시름시름 앓던 예종이 이듬해 승하(1469)하고 마니 왕이 된 지 1년 2개월 만이었다.
정희왕후는 기가 막혔다. 자식이 부모 앞에서 먼저 죽는 걸 참척(慘慽)이라고 하는데 어찌 이 꼴을 세 번이나 당해야 한단 말인가. 세조의 3년 상이 끝나기도 전에 또 국상이 난 데다 왕손들마저 모두 어리니 왕실과 조정의 이목은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에 주목하고 있었다.
○ 남이 장군 역모사건으로 위기 맞기도
이때 왕실의 사정은 급박했다. 왕위에 못 오르고 세상을 떠난 의경세자(추존 덕종)와 인수대비 사이에는 월산대군(16세)과 자을산군(13세)이 있었다.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는 제안대군을 낳았으나 겨우 3세였다. 누구를 왕위에 앉혀도 왕권의 흔들림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역시 정희왕후는 대세 판단에 빠른 흔들림 없는 여걸이었다. 이미 한명회의 넷째 딸과 가례를 올려 겹사돈이 된 자을산군을 택해 보위를 잇게 하니 바로 제9대 성종 대왕이다. 월산대군은 이미 박씨 부인과 혼인해 권력의 핵심축에서 비켜났고 제안대군은 너무 어렸던 것이다. 이것이 왕실 혼인과 권력 간의 함수관계인 것이다. 이리하여 청주 한씨는 덕종·예종·성종의 3대 왕에 걸쳐 4명의 왕비를 배출하는 가문의 융성기를 맞는다.
예종은 14개월의 짧은 재위기간 동안 남이 장군과 영의정 강순의 역모사건으로 최대의 정치적 위기를 맞기도 했다. 남이는 태종의 넷째 딸인 정선공주의 아들로 예종과는 당숙뻘이 되는 촌수였다. 세조 당시 이시애의 난을 평정해 27세에 병조판서직에 오른 무장이다. 그러나 병약했던 예종은 이런 남이를 싫어했다.
때마침 병조참지로 있던 유자광이 남이와 강순을 역모로 밀고하자 예종은 남이를 역신으로 몰아 치죄했다. 한명회·신숙주 등 훈구세력과 신진세력 간의 대결이기도 했던 이 사건으로 30여 명의 무인 관료가 목숨을 잃었다. 역사적 평가야 후세인의 몫이지만 전제군주 시대 정치판에 뛰어든다는 건 목숨을 거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정당한 재판 없이 어명 한 마디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왕손 노릇하기도 위태로운 때였다. 세월이 흘러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도 자랐다. 철이 들고 보니 자기가 오를 임금 자리에 사촌(성종)이 앉아 있는 것이었다. 자칫 언행을 잘못했다가는 목이 달아날 판이다.
풍월정을 지어 놓고 자연을 노래하며 정치와 무관하게 산 덕분에 천수를 누릴 수 있었다. 임영대군(세종의 넷째 왕자)의 아들 구성군은 세조가 아껴 영의정까지 오른 왕손이었다. 워낙 인물이 뛰어나 자신의 아들인 덕종과 예종을 덮고도 남음이 있었다. 왕실의 혼란을 우려한 정희왕후가 귀양을 보냈다가 결국엔 사약을 내려 자결하도록 했다. 조선왕조 내내 왕의 후손들이라 해서 누리고 산 시절은 거의 없었다.
역사의 뒤안길에 장녹수라는 여인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 출중한 외모와 가무 솜씨로 연산군의 총애를 받으며 국사를 어지럽힌 요부다. 가노(家奴)에게 시집갔다가 종3품 숙용(淑容) 자리까지 오른 장녹수는 제안대군 집 여종이었다. 이토록 세조 이후의 왕실 체통은 여지없이 일그러지고 만다.
○ 안순왕후와 左上右下 장법으로 조성
요절한 임금 예종은 역시 요절한 형(덕종)과 함께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산30-1 서오릉(사적 제198호) 경내의 창릉(昌陵)에 안장돼 있다. 동원이강릉으로 계비 안순왕후와 좌상우하(左上右下)의 전통 장법 형식으로 조성됐다. 두 능 모두 간좌(艮坐)곤향(坤向)으로 서남향이다.
안순왕후(1445∼1498)의 출생연도는 일반 역사 기록에는 나와 있지 않다. 그러나 왕실 족보에는 예종보다 다섯 살 위였으며 시어머니 정희왕후와 손윗 동서 인수대비 사이에서 힘겹게 여생을 마쳤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다. 며느리(제안대군 부인) 김씨가 마음에 안 들어 내쫓고 박씨를 새로 들였으나 제안 대군은 끝내 김씨를 못 잊어 다시 복합하는 상황을 지켜봐야 했다.
<이규원 시인 · ‘대한민국 명당’ 저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