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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구릉 안에 있는 선조대왕의 목릉.
원비 의인왕후와 계비 인목왕후의 세 능이 한 능역 안에 있는 특이한 조영 구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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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릉의 정자각.
각 능의 참도가 정자각으로 연결돼 있으며 선조 옆 오른쪽이 의인왕후 박씨의 능이다. | 말을 잘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긴말을 장황하게 늘어놓는다고 말 잘하는 게 아니다. 자기 속내를 요점만 간추려 단시간 내에 정확히 전달하는 재간도 타고나야 한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고 했는데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조선 제14대 선조(宣祖)대왕은 영특한 말 한마디로 천하를 얻은 임금이다. 당시 왕실 법도로 꿈조차 꿀 수 없었던 후궁 소생의 서자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등극 배경은 가히 극적이기만 하다.
어머니 문정왕후의 내정 간섭으로 임금 자리가 고달팠던 명종에겐 천추의 한이 앙금으로 남아 있었다. 아버지 중종 능을 천장하고 난 뒤 외아들 순회세자가 13세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가례까지 올려 세자빈을 맞아들인 다 키운 자식이었다. 이로 인한 상심 탓에 문정왕후가 죽고 자신도 중병이 들었다. 건강하게 무럭무럭 자라는 이복 형·아우들의 자식들이 부럽기만 했다.
○ 후궁 소생 영특한 말 한마디로 왕 등극
대통을 이을 후사가 걱정이었다. 잘못 정했다간 내명부가 뒤집히고 조정이 결딴나는 중대사다. 명종은 이미 세상을 떠난 덕흥군(1530∼1559)의 세 아들 하원군·하릉군·하성군을 기특히 여기며 눈여겨 뒀다. 어느 날 조카들을 궐내로 불러 의중을 떠봤다. 왕관을 벗은 뒤 써 보라며 나지막이 하문했다.
“인군과 어버이 중 누가 중한가.”
두 형이 어관을 쓰고 어루만지며 대답한 다음 막내 하성군 차례가 오자 무릎 꿇고 아뢰었다.
“군왕만이 쓰시는 것을 어찌 신하가 쓸 수 있겠사옵니까. 인군과 어버이가 비록 같지 않으나 충성과 효도는 만행의 근본으로 둘로 나눌 수가 없사옵니다.”
명종이 탄복하며 하성군을 양자로 맞아 대통을 잇게 하니 그가 바로 선조(1552∼1608)다. 이토록 선조는 어려서부터 영민했다. 16세로 등극한 선조를 명종비 인순왕후가 수렴청정했으나 뛰어난 통치 능력을 인정받아 곧 친정체제로 들어갔다. 만 20세까지 수렴청정해 온 왕실 규범으로 볼 때 파격적인 수혜였다.
사람들의 마음속엔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은 자신만의 비밀이 있다. 막상 털어놓고 나면 별것 아닌 데도 혼자 보듬고 지척이며 가슴앓이해야 하는 부끄러움이나 한이다. 선조는 정비(正妃) 손의 대군이 아닌 후궁 손의 군으로 태어난 게 평생의 한이었고 가슴속의 응어리였다. 이는 반상(班常)과 적서(嫡庶)의 사회적 신분이 천양지차였던 당시 계급사회에서 선조에게는 열등감이었고 스트레스였다.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백승이라고 남을 알고 나를 알아야 만사를 이길 수 있다고 했다. 선조는 자신의 약점에 좌절하지 않고 이를 보강하기 위해 즉위 초부터 학문에 매진했다. 매일 경연에 나가 당대의 최고 스승들과 정치와 경사를 논하고 밤새워 경서를 탐독했다. 제자백가서를 관통해 경지를 이루고 난 뒤 사림파 조정 대신 누구와도 대적할 수 있는 이론적 바탕을 갖추게 됐던 것이다.
○ 왜적 침입 알고도 정파 이익에만 급급
조선 중세에 와 선조의 등극이 주는 역사적 의미는 실로 지대하다. 서자가 왕위를 이으면서 이른바 방계승통(傍系承統)이란 이변이 비롯됐고 이로 인한 걷잡을 수 없는 조정의 혼란은 당쟁정치의 발원이 됐다. 사소한 트집으로 침소봉대된 당쟁은 사람 죽이고 귀양 보내는 일에만 전념했다. 왜적 침입을 몸소 확인하고도 국방대책과 국익에는 눈길조차 돌리지 않았고 정파 이익과 자리 챙기기에만 급급했다.
주변국 정세도 파악 못한 채 용호상박으로 이전투구처럼 한 추악상은 참담한 결과로 들이닥쳤다. 1592년의 임진왜란이다. 선조 등극 25년 만의 국란으로 개국(1392) 후 만 200년 만에 당한 국가적 재앙이었다. 정유재란(1597)으로까지 이어진 7년 동안의 전쟁 참화가 가져온 백성의 참상은 굶주리다 못해 인육을 먹는 극한 상황으로 대변된다.
당시 동시대를 산 대표적 인물로는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를 위시해 이산해·정철·심의겸·김효원·이순신·권율·이이첨·유성룡·황윤길·김성일·허균 등으로 귀에 익은 문신과 무관들이다. 난세라서 걸출한 영웅과 희대의 간신들이 명멸했고 이들 모두 공·과를 떠나 당쟁과 연루되지 않은 인물은 단 하나도 없다. 난마같이 얽힌 당쟁의 시작과 전란으로 인한 국체(國體)의 요동은 별도로 다룰 예정이다.
선조의 서자 열등감은 집요했다. 일찍이 공빈 김씨에게서 임해군과 광해군을 얻었으나 안중에도 없었고, 오직 의인(懿仁)왕후에게서만 대군(적자) 출생을 고대했다. 반성부원군 박응순의 딸이었던 의인왕후(1555∼1600)는 몸이 약해 출산조차 못해 보고 46세로 승하했다. 임진왜란이 끝나 전후 복구사업이 한창이던 선조 35년(1602) 33세 연하의 인목(仁穆)왕후를 계비로 맞이했다. 연흥부원군 김제남의 딸로 당시 19세였던 인목왕후(1584∼1632)가 2년 후 아들을 낳으니 바로 영창대군이다.
그러나 이미 세자는 정해진 후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1592년 4월 13일) 대신들은 조정 혼란을 막고 민심결집을 도모해야 한다며 세자 책봉을 결사적으로 주청했다. 하는 수 없이 선조는 권정례(權停例·정식 절차를 다 밟지 않고 거행하는 의식)로 광해군을 책봉(4월 28일)했다.
○ 광해군-영창대군 싸고 동인-서인 갈려
선조와 인목왕후는 영창대군을 바라만 봐도 좋았다. 어떻게 얻은 적통 대군인가. 광해군을 폐세자하고 영창대군을 새로 책봉하려는 선조의 의중을 간파한 대신들의 동태가 가시적으로 포착됐다. 당대 실권자였던 유경영이 적통론을 들고 나서 마침내 조정이 동인(김효원)과 서인(심의겸)으로 두 동강 나니 당쟁의 시초다.
이 살얼음판 정국에서 돌연 선조가 승하한 것이다. 보령 57세로 재위 41년 만이었다. 이때 영창대군 나이 겨우 두 살이었다. 보위는 당연히 광해군에게 돌아갔다. 선조는 숨을 거두면서 대신들에게 영창대군의 뒷날을 당부했다. 이게 화근이고 탈이었다. 광해군은 등극하자마자 무자비한 살상을 자행하며 연산군 못지않은 패륜 무도와 폭정을 저질렀다.
선조가 애지중지하던 영창대군은 폐서인시켜 강화도로 유배 보내 방에 불을 때 쪄 죽였고(蒸殺), 어머니 인목왕후는 서궁에 가둬 유폐시킨 채 12년 세월을 짐승처럼 연명케 했다. 이런 슬픈 사연과 곡절을 보듬고 두 왕비와 함께 있는 선조의 능이 목릉(穆陵)이다. 원래 선조는 동구릉 안 경릉(제24대 헌종) 자리에 있다가 물이 난다 하여 이장하게 됐다.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2-1 동구릉 내 목릉은 태조고황제의 건원릉 서쪽 산록에 임좌병향(동으로 15도 기운 남향)으로 안장된 금대(錦帶·임금의 허리띠) 국세의 명당자리다. 동원이강릉으로 부르나 각기 다른 세 용맥의 산줄기에 선조(왼쪽), 의인왕후(가운데·임좌병향), 인목왕후(오른쪽·갑좌경향) 순으로 예장된 ‘동원삼강릉(同原三岡陵)’ 형식을 취하고 있다. 하나의 정자각에 각 능을 참도로 연결해 놓은 특이한 조영 구조다.
선조와 의인왕후는 먼저 세상을 떠나 뒷일을 모른다 치고 인목왕후의 풀 길 없는 한이 어땠을까 싶다. 아들은 뜨거운 방에서 증살당하고 자신은 자물쇠로 잠근 토광 속에 갇혀 12년을 햇볕도 못보고 살았으니….
<이규원 시인·‘대한민국 명당’ 저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