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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촬영이야기

歷史를 바꾼 한 장의 사진

惟石정순삼 2014. 10. 8. 17:13

입력 : 2015.10.08 03:00

시리아 難民 소년 쿠르디의 최후 장면은 서유럽 門을 열고
4·18 정치깡패 만행 폭로한 신문 사진은 민주革命 촉발
역사의 轉機엔 부조리에 맞선 사진기자의 용기가 있었다

조인원 멀티미디어영상부 차장
조인원 멀티미디어영상부 차장
바닷가 모래에 얼굴을 파묻은 아이는 꼼짝하지 않았다. 밀려온 파도가 아이 얼굴을 적셨지만 그 앞에서 제복을 입은 남자는 뭔가를 적고 있었다. 마침 그곳을 지나던 한 여성 사진기자가 그 모습을 보고 굳어버렸다. 12년간 수많은 난민을 촬영했던 터키 도안통신사의 닐류페르 데미르(Demir)는 숨진 채 해변에서 발견된 아이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안타까웠다. 구명장비 없이 함께 보트를 탔던 아이의 엄마와 형도 가까운 곳에서 익사체로 발견되었다. 데미르는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사진을 찍는 것뿐"이었다고 했다. 그날도 파키스탄 난민들을 촬영하러 가던 중이었다.

한 달 전 터키 남서부 한 휴양도시 바닷가에 얼굴을 묻고 죽어 있는 아이 사진 한 장이 전 세계를 울렸다.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의 위협을 피해 가족들과 함께 시리아에서 터키로 탈출했던 세 살짜리 아일란 쿠르디(Kurdi)는 더 안전한 곳을 찾아 다시 그리스로 향하다가 바다 위에서 고무보트가 뒤집히면서 엄마·형과 함께 죽어갔다. 엎드려 자는 아이의 이불을 덮어준 경험이 있다면 쿠르디의 모습은 더욱 슬프게 다가온다. 살아있다면 일으켜서 바로 눕히고 이불을 덮어 주고 싶다.

하지만 쿠르디는 단순한 익사 사고가 아니었다. 아이를 돕지 못한 주변 유럽 나라들의 복잡한 현실이 안타까움과 분노를 일으키며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유럽 각국은 외지에서 밀려드는 난민들을 결코 반가워하지 않았다. 전쟁과 테러집단의 폭력 위협이 끊이지 않는 시리아나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국민은 안정되고 잘사는 유럽으로 목숨을 걸고 탈출해야 했다. 가난과 내전으로 시달리는 아프리카 국민도 상황은 비슷했다. 지중해를 끼고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목숨을 걸고 유럽으로 향했던 가난한 난민들은 쿠르디 가족처럼 아무런 보호 장비 없이 탔다가 바다 위 보트가 뒤집히면서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다.

잘살고 정치적으로 안정된 서유럽일수록 난민에 대한 규제가 심했다. 총선 때면 이민 규제 강화를 공약으로 내건 정당들이 선거에서 승리했다. 영국의 한 민영방송은 기상천외한 불법 입국자들을 잡아내는 이민국의 활동을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서 매주 방영했다. 덴마크 정부는 레바논 언론에 "우리는 난민을 환영하지 않는다"는 광고까지 냈다. 서유럽으로 가는 길목이 되는 동유럽 국가들은 철조망을 더 높이 세웠고 이방인들을 가둬놓고 추방시켰지만 난민들의 행렬은 줄지 않았다. 난민 문제만큼은 다수 여론을 앞세워 인도주의를 호소한 소수 의견을 묵살하며 서로 묵인하고 있었다.

[조인원의 사진산책] 歷史를 바꾼 한 장의 사진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그런데 사진 한 장이 이런 흐름을 돌려놓았다. 일부에선 "유가족을 생각하면 아이 시신을 보여주는 것이 과연 옳은가" 하는 의견도 있었지만 파도에 쓸려와 해변에 엎드린 채 숨진 소년을 보고 많은 사람이 슬퍼했고 분노하며 반성하기 시작했다. 자유를 찾아 목숨을 건 난민들을 외면하지 말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견에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여론이 바뀌기 시작했다. 여론이 바뀌자 앞다투어 나라마다 난민들을 서로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했다. 이후에 서방 국가들은 난민 문제를 적극적으로 돕거나 서로 분담해서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논의 중이다.

많은 난민이 바다에서 희생되고 매일 그들의 절박한 탈출 행렬 모습이 외신 사진으로 쏟아지지만 꿈쩍하지 않던 유럽의 난민 정책 방향은 데미르가 찍은 사진 한 장으로 수만 명의 난민을 살린 셈이 되었다. 십 년이 넘도록 수많은 난민을 찍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그들을 도와야 한다는 마음으로 현장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일을 했다.

쿠르디 사진을 보며 많은 사람은 1972년 베트남 전쟁에서 폭격을 맞아 벌거벗은 한 소녀가 울고 있는 사진을 떠올렸다. 전쟁이 한창인 무렵 AP통신사 신참 사진기자인 후잉 콩 닉 우트(Nick Ut)는 사이공(현재 호찌민) 근처의 작은 마을에서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돌아갈 무렵 겁에 질려 발가벗고 울며 도망치는 한 소녀의 모습을 촬영한다. 미군의 네이팜탄 폭격으로 소녀가 입고 있던 무명옷에 불이 붙었고, 살기 위해 불붙은 옷을 벗고 화상을 입은 채 거리로 나온 순간이었다. 소녀를 살려야겠다는 마음으로 우트는 사진을 몇 장 찍고 바로 소녀를 안고 병원으로 달려가 진료를 거부한 의사들을 설득해서 전신 화상을 입은 소녀를 살려냈다.

당시 나체 사진은 싣지 않는 통신사 내부 규정에 의해 사진이 못 나갈 뻔했지만 "규칙을 어길 만큼 가치 있는 사진"이라고 판단한 한 고참 에디터에 의해 전 세계 매체를 타고 전해졌다. 사진은 미국 내에서 베트남 반전 여론을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에게도 예가 있다. 1960년 4월 18일 종로4가에서 3·15 부정선거를 반대하며 시위 중이던 고려대 학생들이 정체 모를 괴한들한테 맞아 쓰러졌다. 괴한들은 후에 정치깡패로 밝혀졌다. 사진기자들이 현장에 있었지만 깡패들 때문에 함부로 카메라를 들 엄두조차 못 냈다. 낮이라면 몰래 찍을 수 있었지만 밤이었고 사진을 찍으려면 플래시를 터뜨려야 했다. 하지만 현장에 있던 조선일보 사진기자 정범태는 '이런 현실을 찍지 않는다면 살아갈 의미가 없다. 맞아 죽어도 찍어야겠다'고 결심하고 딱 한 번 플래시를 터뜨리며 사진을 찍은 후 현장을 빠르게 떠났다. 목숨을 걸고 찍은 그의 사진은 다음 날 신문 사회면에 실렸고 결국 4·19 민주혁명의 기폭제가 되었다.

사진 한 장은 가끔 역사의 흐름을 바꾸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사진들 뒤엔 부조리한 현실에 분노하고 슬퍼했던 사진기자들의 용기가 있었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