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들의 사진사랑 이야기]<11> 한진그룹 조양호 회장
‘체르마트 가는 길’ 2004년 스위스. 조양호 회장 촬영.
―2011년 탁상달력 서문에서 조양호》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부친이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 가까워 오는 지금.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운 아들은 아버지 못지않은 경영수완으로 재계에 우뚝 서있다. 그러면서 아버지와 함께 사진을 찍었던 추억과 아버지가 베푼 그 사랑 그대로를 당신의 자식과 나누고 있다. 해외 출장 시 꼭 카메라를 챙기고 기회가 닿으면 아들과 동행해 함께 사진을 찍는 것까지. 이런 카메라를 통한 내리사랑은 한진그룹 조양호 회장과 부친인 고 조중훈 회장, 자신의 장남 조원태 전무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 이어지고 있다. 조 회장을 9일 서울 중구 서소문동 대한항공빌딩의 집무실에서 만났다.
―집안의 사진 내력이 남다릅니다.
“어렸을 때부터 집안에서 각종 카메라를 보며 자랐지요. 아버지도 엔지니어셨고 그 이전엔 배 타는 선원 일도 하셨는데 일제강점기 때부터 중국, 홍콩 등에서 라이카, 콘탁스, 핫셀, 캐논, 니콘 등 각종 카메라를 모으셨어요. 곁에 카메라가 있으니 저도 자연스럽게 사진을 보고 배우고 접했죠.”
―부친의 카메라 컬렉션이 수백 대에 이른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당시 새 카메라가 나오면 오랫동안 새 기종이 나오지 않았어요. 대수는 세어보지 않았지만 그리 많지 않아요. 선친은 사치하는 것을 싫어하셨고 술도 안 드셨어요. 취미라곤 오직 음악 듣고 카메라 사서 사진 찍는 것이 낙이셨죠. 어머니한테도 카메라 모으는 취미에 대해선 아무 얘기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지금도 그 카메라들을 보관하고 계신가요.
“옛날 것들이라 일부는 수장고에 잘 보관하고 일부는 작동이 안 되는 상태라 그냥 두고 가끔 보기만 해요. 나중에 한진 기념관을 만들면 그곳에 전시할 작정입니다.”
―회장께서도 보유한 카메라가 많으신가요.
“저는 질 좋은 것 하나 구입해 오래 쓰는 스타일입니다. 유행을 좇지 않아요. 가장 좋은 것 목돈 들여 하나 사서 몇 년 쓰면서 그보다 월등히 뛰어난 브랜드나 기종이 나올 때까지 사용합니다.”
“아버지는 사업하시는 분이라 사진 찍으러 여행을 다닐 새는 없으셨죠. 선친을 모시고 출장을 다닌 때가 아마도 1980년대 후반, 제 나이 40대 초반일 겁니다. 그때 틈이 나면 아버지랑 같이 사진을 찍었어요. 똑같은 소재를 놓고 사진을 찍진 않았어요. 사진을 찍으면서 카메라 기능에 대한 얘기는 나눴지만 사진은 각자 좋아하는 소재를 찍었습니다. 그만큼 아버지는 개성을 존중해 주셨죠. 언젠가 아버지가 할아버지 사진을 찍었는데 사진에 할아버지 머리카락 한올 한올이 너무나 선명했어요. 카메라 성능이 좋은 것 같다고 만족해하며 사진을 보여 주셨어요. 괜찮은 정물을 찍으면 집안에 걸기도 했고요.”
―장남인 조원태 전무와 함께 사진을 찍은 것은 언제부터인가요.
“아들도 바쁘고 나도 바빠요. 인도, 미얀마 등 몇 차례 출장을 함께 다녔죠. 함께 나갈 일이 있을 때 같이 나가 사진을 찍는 편입니다. 사진 찍는 동안 소재나 사진 스타일에 대해선 서로 간섭하지 않아요. 각자 사진에 대한 시각과 좋아하는 소재가 분명하니 개성대로 찍는 편이에요.”
(얘기를 들어보니 부자지간의 교감 방식은 부친이 조 회장에게 했던 방식과 그대로 닮아 있었다.)
―지난해 말 그동안의 작품을 정리해 사진집을 내셨는데….
“그동안 찍은 사진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124점으로 사진집을 냈어요. 책을 내면서 보니까 필름 카메라를 사용한 예전 사진은 관리를 잘 못해 필름이 없어지거나 사진이 바래서 아쉬웠어요. 2000년도부터 디지털 카메라를 쓰니까 그때부터 제대로 사진을 모으기 시작한 거죠.”
―본인이 사진 찍는 데 영향을 끼친 분이 있다면….
“일 때문에 한국일보 장재구 회장과 같이 여행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나는 기록사진 정도로만 찍으려 했더니 이것저것 세심하게 조언해 주셨어요. 그때부터 사진 찍는 방식이 진지해졌습니다. 제 사진집을 본 장 회장께선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나름의 틀로 사진 찍는 스타일이라며 본인의 성격이 잘 나타난다고 평하더군요.”
―풍경사진을 많이 찍으셨습니다. 이유와 노하우가 있다면.
“좋은 풍경사진을 사람들이 보면 ‘여기가 어디지? 가보고 싶다’라고 생각할 것 아니겠어요. 가보려면 비행기를 타야 하고 그러면 대한항공을 이용하지 않겠어요. 취미로 하는 사진이지만 늘 회사와 관련된 생각을 거두진 않죠. 경영자로서 당연한 거 아닌가요. 풍경사진 노하우라면 예전에는 사진이 될 만한 좋은 경치를 찾아가 찍는 거였죠. 요즘은 진지해져서 느낌이 오는 곳이면 어디든 생각을 하면서 찍습니다. 그리고 다양한 각도로 여러 장을 찍어요. 취미니까 복잡한 것 잊어버리자고 사진을 찍는데 잘 찍어서 달력에 실어야겠다 생각하니까 오히려 스트레스가 쌓여요. 요즘엔 잘 안 쓰던 삼각대와 플래시까지 가지고 다녀요. 아마추어가 욕심을 부려 이것저것 해보려고 하니까 갈수록 짐이 늘어 큰일입니다.”
―앞으로 찍고 싶은 대상이 궁금합니다.
“당장은 힘들 테지만 길을 많이 찍고 싶어요. 새에 대한 사진도 찍고 싶고. 이제 시작 단계인 만큼 시간이 있어야 하는데 그럴 시간적 여유가 생기질 않네요. 새 찍는 일은 굉장히 힘들 것 같아요. 무거운 망원렌즈에다 주로 아침이나 어두워질 무렵에 찍어야 하잖아요. 아직은 생각만 하지만 은퇴한 다음에는 할 수 있겠죠.”
―내년에도 작품을 세상에 선보일 생각이 있습니까.
“특별한 계획은 없고 제가 찍은 사진들로 탁상용 달력을 만들어 지인들에게만 돌렸습니다. 고객용 대한항공 달력에는 제 사진이 1장 들어있고요. 개인달력을 만든 것은 2001년도부터이니까 올해로 10년째입니다. 고객용 달력의 사진은 창덕궁을 찍은 것인데 해외의 공항라운지에 뭔가 한국적인 걸 걸고 싶었어요. 사진작가한테 부탁했더니 굉장히 비싸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한번 찍어 보자 해서 카메라 메고 창덕궁에 갔어요. 일부러 사진 찍기 위해 밖에 나간 것은 이게 처음입니다.”
―주로 쓰는 카메라 기종은….
“캐논 EOS-1Ds 마크3인데 나온 지 한 2년 넘었죠. 엘리자베스 여왕이 캐논 카메라 공장을 방문했는데 사진기자들이 전부 경쟁사 제품을 가지고 취재 하더래요. 그래서 화가 난 캐논 사장이 미국 텍사스인스트루먼츠에 부탁해 시스템을 전자화해 만든 카메라가 EOS시리즈라네요.”
(조 회장의 사진사랑은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선대 회장이 카메라 수집과 사진 찍기 등 순수한 취미에 몰입했다면 조 회장은 격을 한 단계 높였다. 취미에 머물지 않고 사진계 발전을 위해 자신의 호를 따서 세운 일우재단을 통해 ‘일우사진상’을 제정한 후 유망작가 발굴에 앞장선 것. 올해로 2회째를 맞지만 해외 저명 사진가 등을 심사위원으로 초빙해 엄정하게 심사하는 것으로 소문이 나면서 상의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일우사진상’이 사진계에 큰 메세나 역할을 할 것으로 보입니다. 스티븐 쇼어, 디디에 오탱제 등 해외 전문가들을 심사위원으로 위촉하는 이유는….
“일우재단은 여러 가지 문화 사업을 합니다. 그런데 제가 사진을 좋아하니까 사진작가에 대한 지원을 해주자고 했어요. 특히 실력은 있지만 해외에 진출하지 못한 작가들 있잖아요. 해외에서도 통할 수 있게 돕자 생각했어요. 객관적으로 선발하기 위해 제3자이자 권위 있는 외국인이 와서 평가를 하면 좋겠다 생각했어요.”
―‘일우사진상’에 다큐 분야가 하나 늘었습니다.
“사진을 찍을 때 기계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정직하기 때문에 사진을 찍는 것은 정직하다고 나는 생각해요. 요즘은 조합(making) 사진이 늘어나 사진을 믿고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술로 이해해야 하잖아요. 그것도 하나의 트렌드니까 그것은 그것대로 하고, 찍은 그대로 보여주는 분야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이해하기 어려운 사진과 함께 쉽게 이해되는 다큐 사진분야도 넣은 거죠. 재단 예산은 한정되어 있으니까 선택과 집중을 해서 지원해야겠다 했는데 생각이 달라지면서 성격을 조금 변화시켰다고 보면 됩니다.”
―회사 주최 여행사진공모전 심사 때 직접 참여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참석은 하지만 심사는 안 해요. 다른 심사위원들이 혹시라도 내 의견에 관심을 둘까봐서 일절 코멘트를 안 해요. 심사의 공정성 때문에요. 내가 전문가도 아닌데 심사위원들에게 맡겼으면 심사위원들이 결정해야죠. 단, 판에 박힌 관광엽서 같은 사진은 좀 지양해 달라고 부탁드린 적은 있어요.”
―겨울올림픽 유치위원으로서 유치전망은….
“유치 가능성은 막판 한 달에 결정되니까 지금은 서로 막상막하예요. 세 도시가 경쟁하는데 독일 뮌헨하고 우리가 비슷하고 프랑스 안시가 약간 뒤처져 있다는 게 일반적 평이죠. 스포츠정치학은 이거다, 이걸로 하면 이긴다, 그런 공식이 없어요. 마지막 날까지 아무도 장담을 못 해요.”
요즘 그는 평창 겨울올림픽 유치위원으로서 각종 스포츠 행사에 참석하는 등 경영보다 더 많은 공을 들이고 있다. 직접 프레젠테이션도 하고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을 만나 자신이 찍은 풍경 사진집을 선사하면서 유치를 위해 분주하게 뛰고 있다.
그러나 언젠가 세월이 흐르면 조 회장도 후세에게 경영을 물려주고 자신이 쓴 달력의 서문처럼 손자와 함께 사진을 찍으며 4대에 걸친 사진에 대한 내리사랑에 나설 것이다. 들로 산으로 다니며 길도 찍고 새도 찍으면서 말이다. 물론 그때 무거운 짐은 손자 몫이 되겠지만 사진은 한층 원숙해져 새로운 면모를 갖추게 될 것이다. 그의 표현대로 ‘카메라를 통해 보는 세상이 다양한 의미로 다가온다는 것을 진정 아는 사진가’의 모습으로.
서영수 전문기자 kuk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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