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서울 걷기] ①서울 성곽
성곽 품은 프라하와 서울은 닮은꼴
와룡공원에서 창의문까지 4.3㎞가 산책로로 으뜸
지도 한 장을 손에 든 외국인이 서울 사람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낡고 촌스러운 한글 간판이나 골목길 따위를 부지런히 카메라에 담습니다. 그의 눈엔 어떤 새로움이 보이는 것일까요. 외국에 나가면 우리들도 마찬가지죠. 일상을 사는 사람들은 감히 보지 못하는 어떤 것들을 열심히 찍고 기록하고 반추합니다. 돌이켜보면 외국여행에서 쏟아낸 수많은 감탄의 언어들은 서울에서도 충분히 경험할 수 있는 감정. 일상의 렌즈를 여행자의 렌즈로 바꿔 끼워 보세요. 이제 서울이 다른 빛깔과 무늬를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숨은 서울 걷기. 1편은 서울성곽입니다.
◆체코, 비셰흐라드 성곽 산책로의 매혹
단언할 수 있다. 체코 프라하에서 길을 잃는 건 너무나도 쉽다. 이탈리아 베네치아만큼은 아닐지라도, 도시의 좁은 골목을 채우고 있는 상점 진열품들을 넋 놓고 구경하다 보면 어느새 길의 모양이 산만하게 흐트러지고 미궁의 입구가 봉쇄된다. 빠져나갈 틈이 없다. 바로 그때부터 프라하 여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봉쇄된 구시가의 입구를 비밀스럽게 열어젖히면, 중세 유럽의 복제품 같은 구시가와는 사뭇 다른 현대적인 거리가 찬란하게 펼쳐진다. 1968년 소련군이 체코의 민주화 운동('프라하의 봄')을 막기 위해 탱크를 밀고 진군했던, 역사의 아픔을 간직한 바츨라프 광장이다. 구시가를 향해 늠름하게 다리를 뻗고 있는 바츨라프 광장을 가운데 두고, 골목 사이를 구석구석 뒤져보면 미술관과 중고서점, 옷가게와 현대적인 바들이 새록새록 튀어나온다. 길을 잃고 헤매도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은 알리바바의 보물 동굴 같은 도시다.
하루쯤 그렇게 도시를 헤매고 나면 문득 '골목의 지도'를 그려보고 싶다는 소박한 소망이 떠오른다. 도착 직후 죽도록 헤매고 다닌 도시의 풍경을 위에서 거만하게 내려다보고 싶은 욕망이다. 이때 가장 좋은 방법이 비셰흐라드(Vysehrad) 성벽을 따라 걷는 것이다. 지하철 비셰흐라드 역에서 내려 3분 정도 걸으면 '공중에 떠있는 섬' 같은 독특한 성곽 산책로가 펼쳐진다. 산을 탈 필요도, 언덕을 오를 필요도 없다. 워낙 높은 곳에 세워진 성벽이라 그 길을 따라 걷는 것만으로도 프라하 전역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프라하 성에선 구시가의 고풍스러운 풍경만 눈에 들어오지만, 비셰흐라드에선 구시가를 감싸고 있는 신시가지와 그 주변을 따라 방사선으로 뻗어 있는 주택단지까지 꼼꼼히 내려다보인다. 프라하의 과거와 현재, 연륜과 젊음이 매혹적으로 뒤섞인 풍경이다.
- ▲ 서울 도심에서 겨우 20분 거리. 하지만 이 도시 위에 떠 있는 섬은 너무나도 평온하고 운치있다. 1일 저녁, 무악동 인왕산 자락에서 바라본 서울 성곽과 도심 풍경이다. /조선영상미디어 이경호 기자 ho@chosun.com
- ▲ 체코 비셰흐라드 성벽 / 황희연 제공
- ▲ 와룡공원에서 바라본 서울성곽 / 조선영상미디어 김승완 기자
◆비셰흐라드 성벽을 닮은 서울의 요새
서울에도 이와 비슷한 매력을 간직한 곳이 있다. 서울 도심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사대문을 따라 동그랗게 나있는 서울성곽이다. 조선시대 초, 수도 방어를 위해 세워진 서울성곽의 원래 길이는 18.2㎞. 걸어가면 대략 하루가 꼬박 걸리는 긴 돌담길이지만 일제강점기와 근대화시기, 전차 레일을 잇고 도로를 만드느라 평지에 있던 성곽들은 대부분 헐렸다(현재 남아있는 성곽은 산지에 있는 10.5㎞뿐이다). 그 때문에 서대문과 청량리, 용산과 종로, 서대문과 혜화동 사이에 있던 성곽은 듬성듬성 이가 빠졌고, 나머지 성곽들만 돌무더기 상태로 오랫동안 산자락에 방치되어 있었다. 한 도시의 역사를 간직한 성벽치고는 지나치게 초라한 몰골로 버려져 있던 성곽이 재정비되기 시작한 것은 2006년 봄 무렵. 먼저 북악산의 홍련사부터 숙정문, 촛대바위에 이르는 1.1㎞ 구간이 정비됐고, 2007년 4월 와룡공원부터 숙정문, 청운대, 백악마루, 청운대에 이르는 나머지 4.3㎞ 구간이 정비돼 지금은 어엿한 성곽 산책로가 완성됐다.
서울성곽이 매력적인 이유는 진입로가 비밀스럽기 때문이다. 꼭꼭 숨어 있어서 비밀스러운 것이 아니라 온몸을 드러내놓고 있는데도 섣불리 찾아가기 어려운 독특한 진입 장벽을 세우고 있다. 대표적인 서울성곽 산책로는 혜화문부터 낙산공원, 흥인지문으로 이어지는 길과 북악산 와룡공원부터 창의문으로 이어지는 길. 두 곳 모두 대학로와 북촌 한옥마을이라는 대표적인 서울 번화가를 품에 안고 있지만, 이상하게 대학로와 북촌을 오가는 사람 중에 서울성곽을 걸어봤다는 사람은 별로 없다. 길과 길 사이, 건널 수 없는 강물 하나가 흐르고 있는 것처럼 사람들은 번화가 안에서만 노닐 뿐 쉽게 성곽 위로 올라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서울성곽의 대부분이 산자락에 요새처럼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제일 전망 좋은 황톳길
요새는 600년간 말없이 수도를 지키던 그 자세 그대로 서울을 굽어보고 있다. 특히 산책로가 잘 정비된 북악산 서울성곽은 서울 중심가에 있는 길답지 않게 시골 냄새가 풀풀 풍기는 정겨운 곳이다. 시멘트를 바르지 않은 흙길을 걷는 느낌도 좋지만, 웬만한 산꼭대기보다 멋진 전망을 볼 수 있다는 것이 특히 매력적이다. '서울시 선정 우수조망명소'로 지정된 목책에서 서울의 지붕들을 자세히 내려다보면 저 멀리 길상사와 이태준 고택, 성북동과 노원구 일대의 이름 모를 집들이 한눈에 보인다. 말바위 쉼터 전망대에선 경복궁과 광화문 빌딩도 샅샅이 훑어볼 수 있다. 그 어떤 외국의 성벽에서 내려다본 풍경보다 아름답고 고즈넉하다.
서울성곽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책로는 곡장에서 백악마루로 이어지는 산책로다.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것처럼 보였던 돌무더기들이 마침내 길고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내는 곳이 바로 여기 백악산 성곽이다. 성곽의 곡선을 유심히 살펴보면 용이 옥구슬을 머금고 하늘로 올라가는 형상을 쉽게 연상할 수 있다. 이 중 용머리 부분이 백악산이고, 아랫부분이 청와대다. 그 길을 따라 조금 더 걸어가면 경복궁·광화문·숭례문이 일직선으로 내려다보이는 청운대와 인왕산 일대가 내려다보이는 백악마루가 나온다.
번화가에서 불과 20분 거리에 있는 성곽치고는 너무나도 평온하고 운치 있는 풍경이라 얼핏 '도시 위에 떠있는 섬'을 일주한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초록색 산들이 상추처럼 소담스럽게 도시를 감싸고 있는 풍경을 보고 싶다면, 주저하지 말고 북악산 서울성곽으로 올라가 보자. 비셰흐라드 성벽에서 느꼈던 감동과 크게 다르지 않은, 어쩌면 그보다 더 정겨운 감동이 내 품 안으로 따뜻하게 밀려들어 오는 기쁨을 만끽할 수 있다.
※찾아가는 길
지하철 3호선 안국역 2번 출구로 나와 종로 02번 마을버스를 타고 성균관대학교 후문에서 하차, 3분 정도 위로 올라가면 와룡공원 입구가 나온다. 이밖에 지하철 4호선 혜화역 1번 출구로 나와 종로 08번 마을버스틀 타고 종점에서 하차, 5분 정도 걸으면 역시나 와룡공원 입구에 닿을 수 있다. 와룡공원 입구에서 창의문까지 이어지는 4.3㎞의 산책로가 서울성곽 산책로 중 제일 운치 있고 걷기 좋은 길이다. 매주 월요일 휴관. www.bukak.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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