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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아내에게 준 감사장

惟石정순삼 2010. 1. 13. 09:59
강나루 수필가·시인

" 숨겨뒀던 감사장을 슬그머니 꺼냈다.
목청을 가다듬고 읽기 시작했다.
목이 메는 걸참고 읽었다. 가진 사람들의 호화 행사는 아니지만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 않은 기억이다."

전광석화라더니, 엊그제 혼례식을 올린 것 같은데 반세기가 꿈처럼 지나가버렸다. 허무하다. 지나온 삶을 돌아다보니, 여유롭고 즐거웠던 때보다는 고통스럽고 고달프기만 했던 반세기였다. 혹 누가, 한평생을 어떻게 살았느냐고 묻는다면, "그저, 정직하게 살았고요, 남을 해친 적은 없었지요. 나름 최선을 다했고, 앞만 보고 달렸지요" 그 정도로 답할 뿐, 목에 힘주고 자랑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어느 시인은 '사람은 여자의 몸으로 태어나지 말 일, 평생의 고락이 오직 남편에게 달렸으니(人生莫作婦人身, 百年苦樂由他人)'라고 읊었는데, 남편 잘못 만나 평생을 혹사만 당하고, 종내에는 일곱 가지 질병만 짊어진 내 아내를 두고 한 말 같다. 자연히 죄 없는 자식들까지 지지리 고생만 시켰으니 미안하고 가슴이 저릴 뿐이다.

어김없이 결혼 50주년이 다가오자, 이런저런 생각에 마음이 착잡했다. 자식들이 성의껏 자리를 마련할 텐데, 대접이나 받고 일어선다는 것은 아쉽고 무의미할 것 같았다. 이런저런 궁리 끝에 기상천외한(?) 아이디어 한 가지를 생각해냈다. 평생 혹사당한 아내에게 내 진심이 담긴 글을 내 손으로 짓고, 그것을 백지 상장(賞狀)에 정성껏 옮겨 적고 거기에 약간의 위로금을 얹어 주자는 생각이었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곧 지면에 맞춰 글을 짓고 다듬었다. 할 말을 다 하기로 말하면, 두루마리로 몇 발은 써야 할 테지만 곁가지는 칠 수밖에 없었다. 두꺼운 한지를 구하여, A4용지 두 배 크기로 자른 다음, 황금색 선으로 테를 두르고 멋을 냈더니 진짜 상장 용지 같았다. 거기에 붓글씨로 내용을 정성 들여 옮겨 쓰고 낙관까지 했다. 군청색 두꺼운 상장용 표지를 사다 끼워보니 근사했다.

아내에게 줄 감사장을 만들고 나니, 아비 잘못 만나 남달리 고생하며 자란 자식들이 걸렸다. 그래서 4남매 각자에게도 알맞은 문구를 지어 봤다. 그 글도 옮겨 쓰고 도장까지 찍고 두꺼운 표지에 끼웠더니 손색없는 '작품'이었다. 격려 겸 위로금 약간씩을 새 돈으로 바꿔 봉투에 넣어 숨겨뒀다.

당일, 풍광 좋은 교외의 어떤 식당으로 안내하기에 따라갔다. 우리 가족만 모인 단출한 자리였다. 자리를 잡자 푸짐한 음식으로 식탁이 채워졌다. 잔을 받고 나니, 큰아들이 부모님 만수무강하시라며 정중히 건배를 선창했다. 이어 사위도 축하하는 말과 함께 잔을 권했다.

분위기가 무르익어갈 무렵, 큰딸이 선물과 봉투를 내놓았다. 늙은이들은 봉투를 받으면 아이들처럼 입이 벌어진다. 큰 자식을 따라 너도나도 선물이며 봉투를 내놓았다. 우리 내외의 입 양 끝이 두 귀밑에 붙었다. 방 안은 금방 웃음꽃이 만발한 꽃밭으로 변했다. 아내는 그리도 좋냐며 빈정댔지만, 눈물이 흐르면서도 내 입은 웃고 있었다. 내가 흘리는 눈물의 뜻을 나 말고 아내도 짐작했겠지. 장장 반세기를 살 비비며 살아왔는걸.

선물을 다 받고 이런저런 덕담을 나누다 내가 슬그머니 일어섰다. 아내더러 잠시 일어서라 했다. 영문도 모르는 아내는 간신히 일어섰다. 아내는 퇴행성 무릎관절염으로 수십 년간 다리가 불편한 환자다. 그 아내를 나를 향해 돌려세웠다. 아내는 시키는 대로 허리 구부리고 엉거주춤 섰다. 나는 숨겨뒀던 감사장을 슬그머니 꺼냈다. 목청을 가다듬고 읽기 시작했다. 목이 메는 걸 간신히 참고 읽었다. 뜻밖의 내 행동에 모두 어리둥절하더니 곧 다 함께 일어서서 앞으로 두 손을 모았다. 장내는 숙연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감사장

아내 김영희. 당신은 가난한 선비 가문 7남매의 맏며느리로 들어와 50년간 고생 참 많이 했소. 집안의 모든 대소사 도맡아 현명하게 처리했고, 부모님을 지극히 봉양하여 효부상도 받았소. 당신은 나의 병구완을 헌신적으로 하여 살려 낸 내 생명의 은인이고, 4남매 바르게 길러낸 장한 어머니이기도 하오. 숱한 고생 했소. 그 노고와 감사함을 여기에 담아 약간의 위로금과 함께 주니, 부디 지병을 다 털어버리고 고통 없이 여생을 지내다 가기 바라오. ―우리 내외 결혼 한 지 50주년을 맞는 날에. 남편 강현서(필자의 본명).

숙연하던 방 안은 박수소리로 가득 찼다. 아비의 느닷없는 이벤트에 놀라면서도 감동한 표정이었다. 서서 구경하는 종업원 말고는 축하객도 구경꾼도 없는 초라한 기념식이었지만 엄숙하고도 진지한 순간이었다. 나는 또 한 장의 상장을 꺼내어 들었다. 자식들은 또 눈을 크게 떴다. 큰 자식(딸)을 일으켜 세워 상장을 읽고 금일봉을 얹어줬다. 다음에는 차녀에게, 그다음에는 장자를 일으켜 세웠다.

표창장

장자 규성. 너에게 장자 대우도 못해줬고, 고생만 시켰는데 칠전팔기하여 자력으로 기어코 국립대학의 교수가 됐으니 고맙고 장하다. 그리고 눈부시게 활동한다는 여론이 들리니 다행이다. 선임 교수님들께 예의를 갖추고, 제자들을 사랑하라. 동기간을 네 몸처럼 사랑하니 마음 놓고 눈을 감을 것 같다. 모든 가정사에 앞장서기 바란다. 우리 내외 만난 지 반 백년 되는 날을 맞아 표창장과 약간의 격려금을 내린다. ―아버지 강현서, 어머니 김영희

끝으로 막내 녀석에게도 그렇게 했다. 가진 사람들이 벌이는 호화 행사엔 물론 미치지 못했다. 보잘것없는 소꿉장난이랄 수도 있겠지만, 그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 않은 기억으로 남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