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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한자료이야기

추억의 인천의 성냥공장 아가씨 **

惟石정순삼 2009. 3. 10. 11:26

인천의 성냥공장 아가씨 **

인천의 성냥공장 성냥공장 아가씨
하루에 한갑두갑 낱개로 열두갑


치마밑에 감추어서 정문을 나설때
치마밑에 불이 붙어서 XXX이 다탔네

인천의 성냥공장 아가씨는 XXX


 

 

흐르는 세월속에 잊혀져가는 것 - 성냥

 40대이상 군복무를 한 대한민국 남자치고 아마 "인천의 성냥공장"이란

노래를 모르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노랫말을 누가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가사내용이 몹시 저속해 대놓고

부르기에 민망스러운 노래이다.

 

하지만  비속어가 통용(?)되는 군대라는 특수집단 내에선

 6·25 이후 군인들 사이에서 가장 널리 불린「애창곡」이었다.

 

군인들은「우스개 말」이 담긴 이 노래를 부르며 피곤한 심신을

잠시 달래기도 했다.

 '성냥'은 마치 우리 고유어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한자어. 즉 '석뉴황<石硫黃>'이 음운변화를 거쳐

'성냥'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에 성냥이 들어온 것은

1880년 개화승 이동인(李東仁)이 일본에서 가져온 것이 처음이었으나,

 일반인에게 대중화되기 시작한 것은

한일합방 직후 일제가 인천에 '조선인촌(朝鮮燐寸)'이라는 성냥공장을 세우고

대량 생산을 하면서부터였다. 

 "인천에 성냥공장"이라는 말은 바로 여기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일제는 이후 수원, 군산, 부산 등 전국 각지에 성냥공장을 잇달아 설립했는데,

우리에게는 제조기술을 숨기고 일본이들끼리만 시장을 독점,

 성냥 한 통에 쌀 한 되라는 비싼 값을 받아 착취의 수단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그러니 매일 성냥을 만들면서도 성냥 하나 살 수 없었던

가난한 조선의 여직공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를 빼내고자 했던 것도 당연했을 성싶다.

사실 조선시대에도 성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작은 소나무 가지에 유황을 찍어서 딱딱하게 말린

"석류황(石硫黃)"이라는것이 있었는데,

지금처럼 마찰에 의해 불이 붙는 것이 아니라,

이를 화로 속에 집어넣어야 불이 붙는 것이어서 

사실상 큰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선조들은 성냥에 대한 말의 표현이나마

일본식 표현인 '인촌' 대신에

"석류황"을 고집했고, 바로 이 말이 빨리 발음되다 보니

오늘날의 ' 성냥 '으로 변하게 되었던 것이다.

지금은 라이터에 밀려 사양화의 길을 걷고 있지만,

성냥의 발명은 사실 인류에게

 진정한 의미의 불을 가져다 준 셈이다.


성냥이 나오기 전까지는 불이 일단 꺼지면

부싯돌을 수차례 두드리고 나뭇가지를 힘들게 비벼대야 하는

 불편함이 뒤따랐던 것이다.

 

오죽했으면 과거 우리나라에서는

불씨를 꺼뜨리는 며느리를 내쫓기까지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