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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풍경이야기

한국의 보물순례(韓國의 寶物 巡禮) - 1

惟石정순삼 2009. 2. 11. 22:43


 

寶物 巡禮 (1)

 1號  서울 興仁之門

     

東大門이라고도 부르는데, 조선 태조 7년(1398)에 완성하였다가 단종 원년(1453)에

고쳐 지었고, 지금 있는 문은 고종 6년(1869)에 새로 지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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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寶와 寶物의 差異点

우리 나라의 國寶 第1號는 南大門이고, 寶物 第1號는 東大門이다.

남대문과 동대문의 차이는 무엇일까?

이는 국보와 보물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묻는 것과 같다.

國寶와 寶物은 모두 文化財에 속한다.

 

문화재란 말은 "민족문화의 유산으로 보존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의미한다. 문화재청장이 지정하여 보존 관리하는 문화재를 보물과

국보라 하고 그리고 시·도 지방자치단체가 지정하여 보존 관리하는

문화재를 시·도 유형문화재라 한다.

 

문화재 명칭 밑에는 그 문화재의 격이 기록되는데

국보 제△호·보물 제△·중요무형문화재 제△호·천연기념물 제△호

·사적 제△호·중요민속자료 제△호·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호·

경상남도 기념물 제△호 등등이 그것이다

 

국보 제1호와 제2호처럼 문화재의 일련번호는 그 문화재의 가치

높낮이와는 전혀 관련이 없으며 오로지 지정된 순서만을 나타낼 뿐이다.

 

참고적으로, 남대문을 국보로 지정하고 동대문을 보물로 지정한

이유는 1395년에 세워진 남대문이 1396년에 세워지고 1896년에

개축된 동대문보다 건축년도가 빠르고, 또 남대문이 가지는

정문으로서의 의의와 건축기술적인 측면에서의 비중이 크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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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호 서울 보신각 종

     

       

조선시대 만들어진 종으로, 1985년까지 서울 종로 보신각에서

제야(除夜)의 종을 칠 때 사용되었다. 조선 세조 14년(1468) 만들어

신덕왕후정릉 안에 있는 정릉사에 있었으나, 그 절이 없어지면서 원각사로

옮겨졌고  임진왜란 이후 종루에 보관했다.

고종 32년(1895) 종루에 보신각이라는 현판을 걸게 되면서 보신각종이라고 불렀다.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경내에서 보관 중이다 총 높이 3.18m, 입 지름 2.28m,

무게 19.66톤의 큰 종이며, 전형적인 조선 초기의 종 형태를 하고 있다.

 

 37호 실상사삼층석탑 (전북 남원)

 

 

실상사는 통일신라 흥덕왕 3년(828)에 홍척(洪陟)이 창건하였으며 풍수지리설에

의거하여, 이 곳에 절을 세우지 않으면 우리나라의 정기가 일본으로 건너간다 하여

지은 것이라 한다. 이 곳에는 3층 석탑 이외에도 석등, 묘탑, 탑비, 부도,

철조여래좌상 등이 있어 유명하다.

 

 66호 慶州 石氷庫

 

석비와 입구 이맛돌에 의하면, 선 영조 14년(1738) 당시 조명겸이 나무로 된 빙고를

돌로 축조하였다는 것과, 4년 뒤에 서쪽에서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는 내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이 때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규모나 기법면에서 뛰어난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55호  봉정사 대웅전 (경북 안동)

 

 봉정사는 신라 신문왕 2년(682)에 의상대사가 세운 절이라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의상대사가 도력으로 만들어 부석사에서 날린 종이 봉황이

이곳에 내려 앉아 봉정사라 불렀다고 한다.

 

 88호 탑산사 동종 (전남 해남)

 

 

고려 시대 만들어진 높이 79㎝, 입지름 43㎝의 종으로 신라 형식을 계승하면서

고려시대에 새로 나타난 특징들을 잘 보여준다.

 

141호 서울 문묘

 

서울 문묘는 조선 태조 7년(1398)에 처음 세우고 정종 2년(1400)에 불에 탄 것을

태종 7년(1407)에 다시 지었으나, 이 역시 임진왜란으로 타버렸다. 지금 있는

건물들은 임진왜란 이후에 다시 지은 것이다.

문묘는 대성전을 비롯한 동무·서무 등 제사를 위한 공간인 대성전 구역과 명륜당,

동재·서재 등 교육을 위한 공간인 명륜당 구역으로 크게 나뉘어 있다.

 

142호 서울 동묘

 

 

서울 흥인지문(보물 제1호) 밖에 있는 동묘는 중국 촉한의 유명한 장군인 관우에게

제사지내는 묘로서 원래 명칭은 동관왕묘(東關王廟)이다.

동묘를 짓게 된 이유는 임진왜란 때 조선과 명나라가 왜군을 물리치게 된 까닭이

성스러운 관우 장군께 덕을 입었기 때문이라고 여겨서 인데,

명나라의 왕이 직접 액자를 써서 보내와 공사가 이루어졌다.

 

 147호 밀양 영남루

 

 

 이 건물은 조선시대 밀양도호부 객사에 속했던 곳으로 손님을 맞거나 휴식을 취하던 곳이다.

고려 공민왕 14년(1365)에 밀양군수 김주(金湊)가 통일신라 때 있었던 영남사라는 절터에

지은 누로, 절 이름을 빌어 영남루라 불렀다. 그 뒤 여러 차례 고치고 전쟁으로 불탄 것을

다시 세웠는데, 지금 건물은 조선 헌종 10년(1844) 밀양부사 이인재가 새로 지은 것이다.

 

165호 강릉 오죽헌

 

 

신사임당(1504∼1551)과 율곡 이이(1536∼1584)가 태어난 유서 깊은 집이다.

사임당 신씨는 뛰어난 여류 예술가였고 현모양처의 본보기가 되는 인물이며,

신씨의 아들 율곡 이이는 조선시대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루는 훌륭한 학자였다.

오죽헌은 조선시대 문신이었던 최치운(1390∼1440)이 지었다.

 

209호  회덕동춘당 (대전 대덕구)

 

조선 효종 때 대사헌, 이조판서, 병조판서를 지낸 동춘당(同春堂) 송준길(1606∼1672)

선생의 별당(別堂)이다. 늘 봄과 같다는 뜻의 동춘당(同春堂)은 그의 호를 따서 지은

것으로 이곳에 걸린 현판은 송준길 선생이 돌아가신 6년 후 숙종 4년(1678)에

우암 송시열이 쓴 것이다.

 

210호  도산서원전교당 (경북 안동시)

 

도산서원은 퇴계 이황(1501∼1570)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처음 세웠다.

그 중 전교당은 유생들의 자기수양과 자제들의 교육을 하는 강당으로서,

전교당의 앞 마당 좌우에는 유생들이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가 자리하고 있다

 

211호 도산서원 상덕사 부정문및사주토병

도산서원은 퇴계 이황(1501∼1570)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처음 세웠다.

이황 선생은 조선 중기의 유명한 문신으로 여러 벼슬을 두루 거치고 평생을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 힘쓴 분이다.

도산서원 제일 뒤쪽에 있는 상덕사는 이황 선생의 신주를 모신 사당이다.

조선 선조 7년(1574)에 지었고 지금 있는 건물은 1969년 수리한 것이다.

 

213호 삼척 죽서루

 

이 건물은 고려 충렬왕 1년(1275)에 대학자 이승휴 선생이 세웠다.

그 뒤 조선 태종 3년(1403)에 삼척부의 수령인 김효손이 고쳐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름은 누의 동쪽으로 죽장사라는 절과 이름난 기생 죽죽선녀의 집이 있어

‘죽서루’라 하였다고 한다.

 

835호 운문사 대웅보전

신라시대에 세운 운문사는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쳤는데 지금의 절은 조선 숙종 44년(1718)에

있었던 네 번째 보수 때의 것이다.대웅보전도 이때 세운 것으로 추정한다

 

400호 선암사  승선교

 

선암사의 부도(浮屠)를 지나 경내에 이르면 시냇물을 건너야 되는데

그 건널목에 놓인 다리가 승선교이다.시냇물의 너비가 넓은 편이라서 다리의 규모도

큰 편인데, 커다란 무지개 모양으로 아름답게 놓여있다.  

 

 212호 관룡사 대웅전 (경남 창녕군)

 

관룡사는 통일신라시대 8대 사찰 중 하나로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으며,

경치가 좋기로도 유명하다. 원효가 제자 송파와 함께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드리다

갑자기 연못에서 아홉 마리의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 그때부터 절 이름을

‘관룡사’라 하고 산 이름을 구룡산이라 불렀다는 전설이 있다.

 

356호 무량사 극락전 (충남부여)

 

무량사는 신라 말에 범일이 세워 여러 차례 공사를 거쳤으나 자세한 연대는 전하지

않는다. 다만 신라말 고승 무염대사가 일시 머물렀고, 고려시대에 크게 다시 지었으며,

김시습이 이 절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214호 강릉 문묘 대성전

강릉향교는 옛 성현께 제사를 드리고 학문을 갈고 닦는 곳으로, 성균관을 제외한 지방

향교로는 규모가 가장크다. 고려 충선왕 5년(1313) 강릉 존무사(存撫使)였던 김승인이 세웠다

 

281호 광한루 (전북 남원시)

 

이 건물은 조선시대 이름난 황희정승이 남원에 유배되었을 때 지은 것으로

처음엔 광통루(廣通樓)라 불렀다고 한다.광한루(廣寒樓)라는 이름은

세종 16년(1434) 정인지가 고쳐 세운 뒤 바꾼 이름이다.

지금 있는 건물은 정유재란 때 불에 탄 것을 인조 16년(1638) 다시 지은 것으로 부속건물은

정조 때 세운 것이다. 춘향전의 무대로도 널리 알려진 곳으로 넓은 인공 정원이 주변 경치를

한층 돋구고 있어 한국 누정의 대표가 되는 문화재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