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인이었던 한스 홀바인은 1532년 영국으로 건너가 자신의 재능을 꽃피웠다. 영국에서 그 당시 인물의 세세한 부분까지 탁월하게 표현한 홀바인을 필적할 만한 초상화가가 없었다.
홀바인은 영국 왕 헨리 8세의 후원으로 영국 최초의 궁정화가가 됐으며 영국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초상화였다.
헨리 8세를 비롯한 영국왕실, 권력을 지닌 외국 사절단, 귀족사회의 귀부인과 신사들이 홀바인이 자신의 초상화를 그려 주기를 기다리고 있을 정도였다. 헨리 8세는 그에게 초상화를 주문하면서 두 가지 요구사항을 지켜 달라고 했다. 자신의 힘과 권위를 강조하는 이미지와 자신의 신부가 될 여인들의 초상화를 그려 달라는 것이었다.
헨리 8세가 신부의 초상화를 부탁한 것은 왕가의 결혼은 정치적 동맹의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당시 서로 다른 왕조와의 결혼은 두 사람만의 개인적인 일을 넘어 국가의 존폐까지 생각할 정도로 외교상 중요한 수단이었다. 하지만 홀바인은 헨리 8세의 신부들을 실물보다 더 예쁘게 그려 헨리 8세를 실망시키기도 했다. 홀바인이 그린 신부의 초상화는 현재 3점만 남아 있다.
‘영국 왕 헨리 8세의 초상’이라는 작품은 헨리 8세의 주문대로 통치자의 자신에 찬 모습을 가장 잘 그려낸 수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작품은 헨리 8세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했다. 홀바인은 왕의 옷과 장신구 등 지극히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 써서 정확하게 묘사해 격식을 차려 입은 헨리 8세의 권위가 생생하게 전달되고 있다.
그는 왕의 옷에 값비싼 금박과 은박을 여러 군데 사용해 왕의 힘을 화려한 옷을 통해 강조했다. 홀바인은 배경을 그리는데 비싼 물감 푸른색을 사용했으며 배경을 정확한 공간이 아니라 모호하게 표현한 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왕의 권위를 암시한다. 또 배경에 헨리 8세의 그림자가 없는 것은 종교적인 인상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헨리 8세는 앤 볼린과 결혼하기 위해 이혼을 반대하던 로마 가톨릭을 버리고 영국 교회의 수장이 된다. 헨리 8세와 앤 볼린의 결혼은 종교적으로도 중요하지만 많은 사람이 ‘1000일의 앤’이라는 영화를 통해 더 많이 알고 있을 정도다. 홀바인은 앤 볼린을 매력적으로 표현했으나 그녀의 실물을 본 헨리 8세는 혐오감을 드러냈다.
홀바인의 ‘영국 왕 헨리 8세의 초상’은 인물의 개성이 드러나 있으면서도 초시간적 양식과 종교적 의미가 결합됐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인물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는 초상화 의미의 확대라고 할 수 있다. 홀바인은 초상화는 물론 그 당시 왕실에 쓸 장식품이나 실용품들도 디자인했다.
<박희숙 서양화가·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