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성모 마리아를 그린 그림들은 아기 예수와 함께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지만 마리아의 생애를 서술적으로 그린 작품도 등장했다.
로렌초 로토(1480~1557)의 ‘수태고지’가 바로 그런 작품이다.
마리아의 생애와 관련된 사건들은 달력의 축일과 상당히 관련이 깊다. 특히 수태고지가 일어난 3월 25일은 영국과 베네치아 달력에서는 한 해가 시작되는 날이다.
그림이나 기도서에서 마리아는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묘사됐다. 마리아와 관련된 중요한 일화들은 모범적인 여성상을 제시하고 있어 화가들이 즐겨 표현한 주제다.
로토의 ‘수태고지’는 여성의 심리적 묘사가 뛰어난 작품으로서 누가복음서에 의존해 제작했다.
복음서에 따르면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찾아와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여, 기뻐하여라.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라는 말을 전하면서 동정녀 마리아의 배 속에는 그리스도가 잉태된다. 이 소식을 들은 마리아는 몹시 당황하여 무슨 뜻인지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한다.
이 작품의 내용은 누가복음서에 따르지만 ‘수태고지’ 그림 중에 가장 독특한 변신을 보여주고 있다.
화면 왼쪽 붉은 옷을 입은 마리아는 놀라운 소식을 가져온 천사에게 몸을 돌리고 있다. 이 작품에서 마리아는 천사의 등장과 그가 전하는 말에 마음에 동요를 느껴 두려움에 휩싸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마리아 뒤로 보이는 작은 독서대에는 성경이 올려져 있다. 천사가 찾아왔을 때 마리아는 성서를 읽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완벽하게 정돈된 마리아의 방은 성모의 미덕과 성부의 신성한 계획의 명백함을 암시한다. 정돈된 방과 역동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 하나님과 천사의 모습이 대조를 이룬다.
화면 오른쪽 문으로 들어오는 노인이 이 작품에서는 하나님이다. 보통 ‘수태고지’에서는 성부 하나님이 직접 등장하지 않고 비둘기 형상을 하고 있지만 이 작품에서는 하나님이 직접 천사 가브리엘에게 나타나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천사의 등장에 도망가는 고양이 모습도 사실적으로 묘사되었다. 고양이는 이 작품에서 악을 상징하면서 신성한 힘의 계시 앞에서 도망치고 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고양이는 마녀나 악마와 관련된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표현됐다.
화면 오른쪽 푸른 옷을 입고 백합을 손에 들고 있는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를 향해 다가가고 있다. 천사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단호한 자세로 말을 전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가브리엘이 성부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신비 앞에 무릎을 꿇은 자세를 취하고 있다. 가브리엘이 손에 들고 있는 백합은 동정녀의 순결을 상징하는 꽃이다. 로렌초 로토의 이 작품은 로레토 외곽의 작은 도시인 레카나티의 한 성당을 위해 제작됐다.
<박희숙 서양화가·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