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 그레코(1541~1614)는 종교화를 많이 그린 화가로서 르네상스 시대의 방식에서 벗어나 신비스러운 스타일의 새로운 예술을 시도했다. ‘오르가스 백작의 장례식’은 그의 대표작이다.
전설에 의하면 14세기 초 톨레도의 산 토메 교회에서 신앙심이 깊었던 스페인 귀족 돈 곤잘레스 루이스 오르가스 백작의 장례식이 열렸다. 신앙심이 깊은 오르가스를 위해 하나님은 성 스테파누스와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지상에 보내 백작의 장례식에 참여하게 했다.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하늘이 열리고 성인과 천사들에게 둘러싸인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1586년 산 토메 교구의 사제 안드레스 누녜스 데 마드리드는 경제적 이익을 챙기기 위해 장례식의 기적을 그려 달라고 의뢰한다. 백작의 후손들에게 유언의 내용을 상기시키기 위해서다.
1357년에 죽은 오르가스 백작은 임종하면서 매년 산 토메 교회에 기부하도록 유서를 남겼지만 16세기 후손들은 유언의 내용을 거부했다. 엘 그레코는 ‘오르가스 백작의 장례식’을 제작하면서 14세기에 일어났던 일을 재현하지 않고 인물들에게 당시 유행하는 옷을 입혀 동시대의 사건으로 탈바꿈시켰다.
이 작품은 화면이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아래쪽은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장례식이 사실적으로 묘사됐으며 상단부 천상은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나타내기 위해 흐릿하게 묘사했다. 하단부 갑옷을 입고 죽은 사람이 오르가스 백작이다. 그의 머리 위에 황금색의 아름다운 주교복을 입은 사람이 성 아우구스티누스이며 부제복을 입고 백작의 다리를 안고 있는 사람이 성 스테파누스다.
성 스테파누스의 옷에는 돌에 맞아 순교한 장면이 그려져 있다. 화면 오른쪽 레퀴엠을 읽고 있는 사제가 이 작품을 의뢰한 안드레스 누녜스이며 화면 왼쪽 손가락으로 오르가스의 기적을 가리키고 있는 어린아이가 엘 그레코의 아들 조르주다. 이 작품의 주제를 설명하는 조르주는 후에 엘 그레코의 조수가 된다. 그의 주머니 밖으로 나온 손수건에 태어난 해 1578년이 적혀 있다.
조문객들은 그 당시 톨레도 시민들이었다. 상단부 맨 위에 예수 그리스도와 붉은 색의 옷을 입은 성모 마리아가 천상의 중심에 있다. 화면 중앙에 천사가 백작의 작은 영혼을 안고 하늘로 올라가고 있다. 천사는 지상과 천상 중간에 있다. 백작은 아직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을 받지 않아 아기의 모습을 하고 있다. 성모 마리아 옆에 열쇠 꾸러미를 들고 있는 노란 옷을 입은 남자가 성 베드로다.
천국을 지키고 있는 성 베드로는 백작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다. 엘 그레코는 고향 그리스를 떠나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의 궁정 화가가 되기 위해 툴레도에서 활동한다. 그가 툴레도에서 활동하던 시기에 제작된 이 작품은 실제로 오르가스 백작의 무덤에 걸 예정이어서 구도를 그 계획에 맞춰 잡았다.
<박희숙 서양화가·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