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바조(1571~1610)는 신화나 영웅을 표현했던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에서 벗어나 일상생활을 생생하게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그는 정신적인 것을 추구하던 르네상스의 미술과는 다른 인간적인 것에 더 치중했다.
카라바조의 신선한 시각은 유럽 전역에 퍼져 나갔다. 새로운 시대를 열었던 카라바조는 미술사에서 오랫동안 그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카라바조는 전통을 무시하고 인물을 대담하게 표현했다. 전통적으로 큐피드는 귀엽고 천진난만한 어린아이로 표현됐지만 그의 작품 ‘정복자 큐피드’에서 큐피드는 자극적인 소년의 모습으로 묘사됐다. 활과 화살로 사랑을 전파시키는 큐피드가 아니라 벌거벗은 실제의 소년 모습을 묘사해 이 작품은 당시에 외설적인 작품으로 여겨져 파문이 일어났다.
이 작품에서 큐피드는 오른손에 화살을 쥐고 있고 바닥에는 악보와 악기 그리고 책과 펜, 월계관, 콤파스, 각도기가 놓여 있다. 악보와 악기는 음악을 상징하고 책과 펜은 문학, 그리고 각도기와 콤파스는 건축을 상징한다. 큐피드는 무기를 들고 지식과 권력의 상징들을 짓밟고 있다.
이 작품에는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긴다’라는 문구가 있는데 카라바조는 이를 베르길리우스가 쓴 전원시에서 차용했다. 사랑은 학문과 예술을 정복한다는 의미다.
이 작품에서 큐피드의 다리 자세는 미켈란젤로의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묘비’를 위해 제작된 ‘승리’에서 영감을 얻었지만 그 작품을 똑같이 옮겨 놓지는 않았다. 그는 큐피드의 자세를 영웅의 모습도 아니고 어린아이의 모습도 아닌 노골적으로 유혹하고 있는 소년의 모습으로 표현했다.
또 이 작품에서 바닥에 놓여 있는 악보에 가사는 그려져 있지 않지만 메조소프라노 곡의 일부라는 것을 알려준다. 이 작품을 처음 구입한 빈체초 주스티아니 후작이 음악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카라바조는 그를 칭송하기 위해 악보와 악기를 그려 넣었다.
하지만 주스티아니 후작의 집에 있던 이 작품은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그림 위에 초록색 천으로 덮여져 있었다. 25년 후 시인 페트라르카가 호기심으로 그것을 들추어 세상에 다시 나오게 됐다.
카라바조가 친구 오라치오 젠틸레스키에게 보낸 편지에서 ‘날개 한 쌍’을 돌려달라고 재촉하는 편지 덕분에 이 작품의 제작연대가 정확하게 1602년이라고 밝혀졌다.
미술사를 통틀어 가장 혁신적 화가인 카라바조는 무질서한 삶 때문에 극적인 인생을 살았다. 이 작품을 완성할 당시에도 카라바조는 여러 가지 범죄나 법적 분쟁에 시달리고 있었다.
<박희숙 서양화가·시인> |